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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추석의 산중 한담

양평 서종리 텃밭 방문기

by 정석진

추석 당일에 비가 내렸다. 아이들이 외국여햄을 떠나는 바람에 집에는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다소 쓸쓸한 명절이 될 뻔했다. 친한 교회 동생네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다. 세 딸들이 프랑스와 호주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함께 그의 형님의 경기도 양평에 있는 텃밭으로 놀러 가게 되어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들 부부와는 30년 이상을 가깝게 지내 친동기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다. 은퇴한 그의 형네가 몇 년 전에 양평 산골에 주말 텃밭을 일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농막도 있어서 후배는 가끔 그곳을 다녀오곤 했다. 그곳에서 푸성귀를 가꾸는데 손을 보태고 고기도 구워 먹으며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간 우리 부부도 여러 번 가고 싶었 는데 짬이 나질 않다가 오늘에야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가는 길이 원활할 할 것 같았는데 비가 오는 데다 성묘객들이 많아서인지 도로가 많이 막혔다. 정체가 되어도 바쁠 것이 없었고 내리는 빗 속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간식도 먹으며 가니 마음은 한없이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양평에 다다르자 산봉우리에 운무가 서렸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참을 달리며 우리는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가을비가 내리는 산중 풍경이 차창 밖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산길을 한참을 달리다 예쁜 전원 마을이 나타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농막에서 처음 뵙는 형님네는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형님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다정했고 형수님은 밝고 생기가 넘치는 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텃밭은 꽤 넓었고 다양한 채소들이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밭고랑에는 큰 고추들이 주렁주렁 줄 지어 달렸고 배추는 한참 속이 차는 중이다. 쪽파도 푸르고 부추밭에는 꽃이 피었다. 고구마 밭에는 왕성한 줄기들이 기운차다. 무도 굵어간다. 들깨는 사람 키만큼 크다. 오이와 가지도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작물들은 전부 전문 농사꾼이 지은 것 같이 다 튼실하다. 농군이 아닌데도 이런 성과를 내는 것이 놀라웠다.


밭 주위에는 과일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철 지난 복숭아와 자두는 잎이 무성하고 제철인 밤나무에는 크지 않지만 벌어진 밤송이가 달려 있고 사과나무에는 앙증맞은 사과가 달렸다. 대추나무에도 대추알들이 발그레 익어간다. 그 틈에 나는 알밤도 줍고 대추도 따 먹고 사과도 맛보며 전원을 누렸다.

울에는 소담스러운 구절초가 한창 꽃을 피우는 중이고 철 지난 덩굴장미에도 꽃송이가 맺혔다. 달리아와 꽃범의 꼬리도 얼굴을 내밀고 방앗잎은 보랏빛 꽃대를 너도나도 곧추 세우고 있다. 작은 허브밭에도 여러 가지 허브들이 자라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내실이 있어 텃밭이라기보다는 작은 농원 같다.

밭에서 기른 찐 옥수수를 내주신다.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맛이 달큼하다. 때로는 자연 그대로의 맛이 최고일 때가 있다. 순전한 자연을 음미하는 멋진 순간이다.


비가 내려 운치 있는 날에는 빈대떡이 잘 어울린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빈대떡을 즐기기로 했다. 부추를 잘라오고 방앗잎을 따고 깻잎을 땄다. 마침 오징어도 있어서 재료는 완벽하다. 즉석에서 형수님은 솜씨 좋게 빈대떡을 만들어 냈다. 허브향 감도는 고소하고 바싹한 맛에 너도나도 손이 간다.

비로 다소 쌀쌀하지만 마음에는 따스한 온기가 넘친

산에 밤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서 남자 셋이 바로 출동했다. 비가 내려도 개의치 않고 장화를 신고 우의를 챙겨 입었다. 몽땅 주울 욕심으로 배낭까지 메었다. 산에는 밤송이가 널렸고 밤이 수두룩했다. 허리 펼 틈도 없이 신나게 밤을 주웠다. 산골짝의 아기 다람쥐처럼 알밤으로 양 볼을 불룩하게 채웠다. 나이가 들어도 동심은 여전히 소년의 마음이다. 짧은 시간에 꽤 많은 양을 줍고 돌아왔다.


아침도 거르고 와서 시장했는데 만찬이 펼쳐졌다. 전복을 굽고 삼겹살을 구웠다. 난로도 피웠다. 쌈채소에 고추와 마늘을 곁들이고 맛깔스러운 파김치와 물김치가 입맛을 돋운다. 형님의 고기 굽는 솜씨가 고수급이어서 접시에 고기가 남을 틈이 없다. 밥을 멏 번 퍼왔는지 기억도 없다.

과일을 후식으로 먹는 데 커피를 빼놓을 수 없다. 형님이 내려주신 커피도 일품이다.

몽땅 꺾어온 고구마 순을 함께 까며 자연스럽게 형님네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인근 골프장에서 직장도 얻어 형님은 바쁘게 사는 중이란다. 그런 형님은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고 형수님도 행복해 보였다. 잘 사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전원 속에서 적당한 노동과 쉼이 있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사람이 손을 보태니 산더미 같던 고구마 순이 금방 손질이 끝났다. 지루하고 단순한 노동도 함께 하면 놀이가 된다.

비 내리는 전원을 바라보며 따스한 난롯가에서 마시는 향기로운 커피가 하루의 정점을 찍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누리는 여유는 진정한 호사였다.


쓸쓸할 뻔했던 추석이 알뜰한 날이 되었다. 좋은 분들이 베풀어준 호의와 친절이 우리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사했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전원 #텃밭 #추석 #밤줍기 #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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