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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Apr 05. 2023

텅 빈 벤치에 여백이 흐르고

봄비 내리는 날의 서정시와 에세이

봄비가 내린다

비를 맞이하려 베란다를 연다


여름 같았던 뜨거움은 가고

냉장고의 서늘한 기운이 온다


겉옷을 두르며 보는 풍경.


흐린 날인데도

우듬지의 잎들이

맑은 날에는

꽃처럼 노랗더니

선명한 초록빛으로

야광처럼 빛을 뿌리고 있다


비에 목련은 하염없이 지고

나무 밑동에 깔린 갈잎은

봄에 젖어 붉게 물든다


세상 소음에 섞인 빗소리에서

순수한 비의 노래를 걸러낸다

웅얼거리는 울림,

멈춤이 없는 두드림,

질리지 않는 속삭임이 흘러나온다


힐끗 보면 보이지 않는 비가

건너 창에 비쳐보면

쉴 새 없이 선을 긋고 있다


고요한 사색에 젖은

텅 빈 밴치에 여백이 흐르고

발치의 물웅덩이에는

동심원이

끊임없이 새겨지고 지워진다


사람들은 차분하게 생각에 잠기고

자연은 차오르는 기쁨을 안고

새로운 계절을 뜨겁게 맞는

비가 여는 봄날이다




갈했던 대지에 기쁨을 뿌리는 단비가 내린다. 한동안 계속 메말랐던 푸석했던 땅이 촉촉이 젖고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하늘을 맑게 씻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비다. 오전에 책 한 권을 읽고 휴식을 취하다 빗소리를 들으러 베란다로 나갔다. 꼭 닫은 창을 열고 방충망도 열어젖힌다. 찬기운이 밀려온다. 여름 같았던 낮 기온이 비가 내린 후에는 뚝 떨어진다고 하더니 벌써 그 여파가 전해진다.

비 오는 흐린 날인데 눈에 들어온 풍경은 맑음이다. 느티나무 우듬지에 새순들이 비에 젖어 선명한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물오른 나뭇잎의 싱그러움이 전해져 온다. 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반가운 귀인이 찾아온 것일까? 기쁨에 젖어 방방 뛰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절로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흔히 흐린 날에는 기분도 가라앉아 처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초록이 넘실대는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도 밝아지는 기분이다.


건너편 건물에 환하게 피어나던 목련이 꽃잎을 뚝뚝 떨궜다. 밍그적 대며 질척이는 낙화보다는 이 비에 미련 없이 지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아직도 나목 그대로 잠들고 있는 게으름뱅이들도 있다. 이들을 깨우려는 듯 비는 부드럽게 나무에 젖어든다. 밑동에 깔린 갈잎들도 봄비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세상 소음이 함께 섞여있다. 가만히 기다리며 빗소리를 채로 걸러낸다. 울림이 있고 두드림이 있고 속삭임이 있다. 단순히 반복되는 자연의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빈 벤치는 마치 비를 맞으며 사색에 젖어 있는 듯하다. 발치 웅덩이에 동심원이 끊임없이 문양을 만들어내고 사라진다.


비어있음은 여백이다. 여백에는 한가함과 자유로움이 담겨 있다. 퇴사를 하고 일을 쉬고 있는 지금이 바로 여백의 시간이다.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바삐 해야 했던 시간이 지나고 저 빈 벤치처럼 한가한 시간이다. 주어진 은혜의 시간을 버리지 않도록 서두름 없이 천천히 잎을 틔우고 성장해 가는 나무의 길을 따라가 보자. 조금씩 여백을 채워나가며 미지의 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 보자.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이다. 봄의 기운을 받아 생기가 넘치는 오늘을 기대해 본다

#시 #에세이 #봄비 #여백 #글로성장연구소 #별별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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