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했던 대지에 기쁨을 뿌리는 단비가 내린다. 한동안 계속 메말랐던 푸석했던 땅이 촉촉이 젖고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하늘을 맑게 씻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비다. 오전에 책 한 권을 읽고 휴식을 취하다 빗소리를 들으러 베란다로 나갔다. 꼭 닫은 창을 열고 방충망도 열어젖힌다. 찬기운이 밀려온다. 여름 같았던 낮 기온이 비가 내린 후에는 뚝 떨어진다고 하더니 벌써 그 여파가 전해진다.
비 오는 흐린 날인데 눈에 들어온 풍경은 맑음이다. 느티나무 우듬지에 새순들이 비에 젖어 선명한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물오른 나뭇잎의 싱그러움이 전해져 온다. 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반가운 귀인이 찾아온 것일까? 기쁨에 젖어 방방 뛰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절로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흔히 흐린 날에는 기분도 가라앉아 처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초록이 넘실대는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도 밝아지는 기분이다.
건너편 건물에 환하게 피어나던 목련이 꽃잎을 뚝뚝 떨궜다. 밍그적 대며 질척이는 낙화보다는 이 비에 미련 없이 지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아직도 나목 그대로 잠들고 있는 게으름뱅이들도 있다. 이들을 깨우려는 듯 비는 부드럽게 나무에 젖어든다. 밑동에 깔린 갈잎들도 봄비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세상 소음이 함께 섞여있다. 가만히 기다리며 빗소리를 채로 걸러낸다. 울림이 있고 두드림이 있고 속삭임이 있다. 단순히 반복되는 자연의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빈 벤치는 마치 비를 맞으며 사색에 젖어 있는 듯하다. 발치 웅덩이에 동심원이 끊임없이 문양을 만들어내고 사라진다.
비어있음은 여백이다. 여백에는 한가함과 자유로움이 담겨 있다. 퇴사를 하고 일을 쉬고 있는 지금이 바로 여백의 시간이다.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바삐 해야 했던 시간이 지나고 저 빈 벤치처럼 한가한 시간이다. 주어진 은혜의 시간을 버리지 않도록 서두름 없이 천천히 잎을 틔우고 성장해 가는 나무의 길을 따라가 보자. 조금씩 여백을 채워나가며 미지의 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