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한 후 집 주변의 탐색은 계속 되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좀 멀리 떨어진 곳까지 시간되는 대로 주변의 경치가 좋은 곳이나 생활에 필요한 장소를 찾아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동네 산책을 하면서 숲길에 낙엽이 떨어져 수북히 쌓인 모습에서 옛날에 읽었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작가는 낙엽을 태우는 행위가 시간이 소멸하는 일이 아니라, 또 다른 생활의 활력을 찾아오는 일이라고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낙엽은 마치 지금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낙엽이 떨어짐은 끝이 아닌 계속되는 삶의 과정을 말해주고 때론 삶에 추임새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따라 사그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도 쓸쓸하기보다 무척 정겹게 들렸다.
발길은 1시간 가량 계속 숲길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고인돌 산책로'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고인돌 1기와 좀 떨어져 2기~6기가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129호인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파주시의 다율리, 당하리, 교하리가 인접한 구릉지대에는 1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분포되어 있었는데, 군사시설이 들어 서면서 대부분 파괴되고 20여 기가 남아 있으며 그 중 6기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후략>}
내가 알고 있는 고인돌은 강화도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4개나 2개의 받침돌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모양만이 고인돌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대부분 바닥에 돌을 올려 놓은 모양이었다. 설명이 없으면 그냥 커다란 돌들이 바닥에 있는 정도로만 이해했을 것이다. 고인돌의 주인들도 그 당시는 지배층으로 잘 살았겠지만, 지금은 돌로만 남아있는 모습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부유층으로 살아서 후대까지 고인돌로나마 흔적을 남겼지만, 그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민초들은 아무 흔적도 없이 다시 흙으로 돌아갔을 것을 생각하니 ... 행복의 조건은 다 다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삶의 모습은 비슷비슷한 것 같다.
무성하게 숲을 이룬 길을 남편과 함께 걸으면서 켜켜히 쌓여 있는 낙엽을 밟으며, 또 낙엽을 바라보며 마음 한쪽은 감상(感傷)을, 또 다른 한쪽은 활력(活力)을 갖는다. 만추(晩秋)를 보내면서 느낀 나의 단상(斷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