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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Mar 24. 2022

집안의 원칙·규칙 만들기

2014.6. 계간 <니> 35호, '규칙과 합의'

    

어릴 적, 아주 어릴 때는 아니고 학교에 다니던 때, 특히 중학교 이후에 아빠는 가족회의 하자는 말을 자주 하셨었다. 우리 세 자매가 싸우고 나면 그 얘기를 꼭 하셨었다. 하지만 가족회의를 열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건, 아빠가 그 말을 꺼내면 난 신경질적으로 “회의는 무슨 회의야! 됐어!” 하며 우리 집에서 회의가 가능하겠냐,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거냐는 속마음으로 회의를 거부했다. 답답했고 싸운 것에 대해 들춰내 다시 얘기하는 게 짜증이 났었고, 그래 봤자 뭐가 달라질 건가 하는 의구심이 컸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의 제안은 참 좋은 제안이다. 목소리 크게, 감정적으로 싸우고 욕하고 할 것이 아니라 찬찬히 나누는 대화가 필요했다, 우리 집에서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미 우리 집은 대화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그런 식으로밖에 싸울 수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생뚱맞게 회의라니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민으로서 문화가 전혀 없는 곳에 민주적 절차만 들이미는 것과 비슷한 느낌.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난 자라면서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왜 그런지 이유를 잘 모르기도 했고, 또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상황에 따라 분출도 했다가 그냥 참기도 했다가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과제하다 짜증을 잘 냈는데 사회교과서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외우면서, 또 세계지도를 그리면서 책도 던지고 욕도 하다가 울기도 했다. 선생님의 말 하나하나를 그대로 하려니 힘들었다. 그때는 외워서 쓰라면 조사나 쉼표도 똑같이 해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 또 지도 그리는 숙제를 내주는 이유가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의 모양을 알아보기 위한 거란 설명을 들었음에도 그 모양이 많이 비슷해야 한다고, 그럴 때까지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힘들었다. 부모님은 선생님 말을 잘 듣느라 내가 짜증내고 화내는 건 별 얘기 없으셨다. 다만 신경질적인 아이란 꼬리표가 항상 따라붙었다. 


그렇게 난 신경질적인 아이가 됐고 동생들과도 잘 싸우는 아이가 됐다. 싸우게 된 상황이 있고 순서가 있고 잘잘못이 있기도 한데 언니인 내가 신경질 내서 참지를 못하고 싸움에 이른 게 됐다. 아니면 그 애는 원래 그런데 참아야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 신경질적인 아이더라도 집에서 하는 행동의 허용선, 시비 붙기 좋아하는 아이더라도 하면 안 되는 것이 규칙이라면 그런 규칙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너무 심하면 매를 맞기는 했다. 형제간에 사이좋게 지내기, 엄마아빠 말씀 잘 듣기, 공부 열심히 하기 정도가 우리 집 규칙 아니 원칙이었나 보다. 

 



예전 살던 집에서는 규칙을 만들거나 할 생각을 못 했던 나는 결혼을 하면 시간이든 의견이든 뭐든 많이 공유하는 생활을 꿈꿨었다. 그러면 자연히 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집의 모든 것이 결정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다. 당연히 같이 보내리라 생각했던 퇴근 후 시간에는 각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같이 있어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뤄지지 않았다. 난 각자 통장이나 카드 명세서를 공유하자 주장했었는데 그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하게 다투게 되고 그러고 나면 관계가 냉각됐다. 관계가 얼었다 풀렸다 할 때마다 난 그 얘기가 하고 싶은데 얘기만 하면 싸우니 덮어두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됐다. 하지만 둘 사이 분위기가 부드럽고 기분도 좋을 때면 그 문제를 덮어놓고는 이렇게 기분이 좋고 행복해도 될까 의문이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란 생각이 들면서 그때 느낀 행복은 불안해지고 진정한 행복이 아니란 생각에 짧게 끝나고 만다. 


새로 가정을 꾸미면 당연히 새로운 규칙과 원칙을 정하고 그걸 따르려 노력하게 될 줄 알았는데 예전 집에서 하던 대로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두 사람 사이 규칙 정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고수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란 확신이 커서 양보나 타협의 틈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난 집안일은 나눠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요구했는데 남편이 연봉을 들먹이며 연봉이 적은 사람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자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을 공격받아 더 이상 이야기해볼 생각도 들지 않고 이혼만 생각했던 적도 있다. 갈등하면서 내가 느끼는 바를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건 서툴고 상대를 전근대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나와 함께 살아서는 안 될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건 쉬웠다. 더 이상 상대에게 해명을 요구하거나 그다음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었다. 


그렇게 덮어뒀으니 각자의 생각은 평행선을 달릴 테고 좁혀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방식들이 있는데 그 생각을 하면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기에 좋지 않고 내가 손해를 본다는 느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내가 합의에 실패했다고 여기는 부분에 집착하기에 앞으로 합의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막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남편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인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기도 했다. 합의를 하는 데에는 상대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너와 나 우리를 위한 주장을 펴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자라면서 나는 세상의 많은 규칙들을 알려주게 됐다. 교통신호를 설명해주자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하냐고 한다. 규칙은 규칙인데 다 지키는 건 아니고 안 지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항상 다칠 위험이 있다는 정도로 얘기해주는데 뒤끝이 좋지가 않다. 교통규칙은 심플하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지금 있는 세상의 모든 규칙이 그럴까 싶어 미리부터 그런 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고민이 된다. 또 이 아이와 우리 집의 규칙은 어떻게 정할 건가 궁금해진다. 요즘 질문하는 추세로 보건대 그냥그냥 뭔가를 하라고 하는 건 통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항상 ‘왜?’가 빠지지 않으니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규칙, 원칙들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엄마가 하는 말을 믿으라고 하니 왜 엄마가 하는 말을 믿어야 하냐고 한다. 


난 내가 자랄 때처럼 “엄마가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인데 왜 그리 토를 다냐”라고 할 건지 “엄마가 하는 말도 잘 듣고 네 생각을 얘기해보라”라고 할 건지 기로에 서 있다. 난 바뀌어야 한다. 나에게 밴 습관, 관성을 떨쳐내고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에게 내 말을 듣고 네 의견도 얘기해달라고, 들어보겠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쉽지 않고 피곤할 수도 있다. 그렇게 설명하고 설명을 듣고 의견을 나누며 좁히는 걸 귀찮고 피곤한 일이라 여기는 것부터 변했으면 좋겠다.     



정은선_남편과 6살 세훈이와 살면서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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