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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Mar 17. 2022

엄마처럼 죽지 않을 거야!!

2013.12. 계간 <니> 33호 '어떤 노인으로 살까'

엄마를 다시 본 건 마지막으로 본 지 10년쯤 뒤였다. 그 사이 엄마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들었고, 몸에는 암이 생겨 몇 차례 수술, 약물치료 그리고 입원 중이었다. 흰머리 뭉치가 머릿속에 생긴 것을 봤었지만 반백이 된 머리, 얼굴에 없던 깊은 주름이 낯설었다. 병 때문으로 보이는 부은 몸, 터진 발꿈치도 그랬다. 목소리는 비슷했고 말투와 말하는 내용은 거의 그대로였다. 



간암인 엄마는 뭘 잘 먹지도 않았고 설사로 괴로운 듯했다. 6명이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에 오래도록 있었다. 엄마의 각질 투성이 발은 정말 눈에 거슬렸다. 대야에 따뜻한 물 받아 씻겨주고 싶기도 했지만 나도 그럴 여유는 없었다. 


동생들은 이미 엄마 병원 수발을 하고 있었다. 난 엄마를 오랜만에 봤음에도 크게 충격을 받지도, 슬프지도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았다. 시간의 간격이 느껴지는 모습에 눈물이 조금 났었다. 엄마는 죽기 전엔 연락을 안 할 거란 생각에 죽어도 모를 수 있고, 또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 봐 마음이 쓰였는데 어디 있는지 알고 나니 그 걱정은 끝이었다. 


엄마가 많이 아프긴 하지만 막상 죽을 거란 생각은 별로 못 했었다. 몇 기인지는 몰라도 간암이고 외가 쪽 식구들이 그 병으로 돌아가신 걸 봐왔음에도 죽을지 몰랐다.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다. 


동생은 계속 엄마에게 식이요법이 필요한 줄 알고 있었다. 배에는 복수가 차서 빼는 시술을 하는데도…. 마약성 진통제가 안 들어 용량 최대치를 쓴다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럼 그 진통제가 최종인데 그것도 안 들면 어떡하냐는 내 말에 의사는 대답을 안 해줬다. 지금 기억나는 그 남자 의사의 눈빛, 그런 눈빛이면 한마디 해주면 안 됐었냐고…. 엄마가 의식이 왔다 갔다 하다 의식이 없을 때도, 숨만 쉴 때도 영양액과 수액이 계속 공급됐다. 우리는 엄마에게 그것이 필요하고 그러면 안 죽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본인이 그렇게 금방 죽으리란 걸 알았을까? 수술 더 받고 했음 살 수 있다 여겼을까? 아주아주 가쁜 호흡을 꽤 오래 계속했던 건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까?


엄마의 레퍼토리는 자신이 결혼한 사람, 내 아빠가 차갑고 자신을 안 위해주고, 자식도 정 없다는 것. 남편 복 없는 년이 자식 복은 있겠냐는 이야기로 귀결됐다. 그 자식 복에 해당되는 내가 엄마의 기대에 맞추지 못했다. 내가 공부도 성실히 하고 대학도 선생님 되는 최고 대학에 가서 짝꿍도 선생님으로 만나 부부가 선생님인 것이 엄마의 꿈이었다. 난 성적은 나와도 성실한 편이 못 됐고, 대학도 엄마 마음에 드는 곳으로 못 갔고, 대학에서 남자도 못 사귀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졸업하는 걸 보지 않고 떠난 걸까?


엄마에게 제정신이 있을 때 한 나와의 마지막 통화… 엄마가 엄마의 그 꿈을 잊지 않고 그동안도 계속 되뇌고 있었다는 걸 보여줬다. “엄마 말이 맞지? 살아보니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것이 없지?” 살아보니 엄마의 말을 부정하긴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 나는, “살아보니 엄마 말이 맞는 것도 같네. 그래도 내가 택한 인생이고 후회해도 이렇게 사는 수밖에 없지” 했다. 


엄마가 만들어놓은 좋은 계획에 나를 맞추길 거부했던 나는 원래 생각하지도 않던 대학, 과에 들어갔고 그 학과가 나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 과 사람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혼자 다니는 생활을 했었다. 힘들어도 엄마에게는 힘들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한 것에 힘들어한다는 건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난 어떻게 해야 엄마의 말에 따르지 않고도 내가 잘 산다는 것을 보여줄지 모르면서 엄마의 말대로 하는 게 싫어 어떻게든 따르지 않으려 했었다. 


엄마는 내가 얼마나 나를 형편없이 생각하는지, 그래서 나란 사람은 선생님을 하기엔 얼마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난 자라오면서 나에 대한 자신감이 항상 부족했다. 엄마의 말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나는 열심히 않고 받는 내 성적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벼락치기를 잘해서, 운이 좋아서 그런 거니 사람들이 내 진짜 실력을 알면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 성격은, 엄마에게 항상 지적당하는 것처럼 그리 좋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생을 하면 아이들을 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교육과에 있는 인성검사에서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 껍데기 속의 내가 정말 부끄러웠던 나는 거짓이라 생각했던 껍데기마저 부서지자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나에겐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만 있었다. 본래의 나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그걸 어떻게 찾나 싶고, 그게 무엇이었을까에 집착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모르면 나를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정말 모르겠는 나는 이미 뒤늦었고 아무것도 할 수 있을 사람 같지가 않았었다. 


엄마를 만나지 않고 산 10년 동안 난 못난 모습대로, 그래도 뭔가 하면서 살려고 노력했다. 어떤 것도 시작하기 어려워했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자꾸 틀어박히려는 나를 나오게 했다. 영화를 보러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작은 직장에도 나가고 연애도 했다. 내 옆을 스치는 어떤 기회라도 잡아보려 했다. 그리고 잡은 기회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는 것이, 내 자식을 나처럼 만들지 않는 것이 내 목표가 됐다. 사실 결혼도 안 하는 게 목표였다. 불평하면서 지속하는 결혼에 물릴 대로 물렸었다. 차라리 두 분이 따로 살게 된 것이 축복으로 느껴졌다. 계속 똑같은 말을 하며 싸우는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는 부부는 부부를 유지하는 게 무의미하다 생각했었다. 자식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만 이야기하고 자신이 느끼는 바는, 자기의 이야기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엄마가 싫었다. 내 어깨에 올려진 짐,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럴 수밖에 없는 엄마가 애처롭기도 했지만 그런 엄마와 살기는 참 갑갑하고 싫었다. 


지금은, 아이를 하나 키우는 지금은 3년 사이 아이 셋을 키우게 된 엄마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그렇기에 난 내 아이의 동생을 낳기가 정말 힘이 든다. 육아에 있어 내 맘 같지 않은 남편 때문에 둘째를 선뜻 말할 수 없기도 했지만 내 속에는 터울 적은 딸 셋을 키우면서 보아온 엄마의 고됨, 후회, 원망이 함께 있다. 나도 같은 상황이 되면 엄마와 다르게 되리란 보장이 없다. 난 아직 나를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난 엄마처럼 죽지는 않을 거다. 자식에게 투영했던, 끝내 못 이룬 꿈과 미련과 후회를 안고 그걸 끝없이 되뇌며…. 엄마가 실제로는 그러질 않았기를 바란다. 내가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내 속에 내가 엄마의 것이라 여기는 틀이 고스란히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기에. 내가 추구해야 하는 건 엄마처럼 살다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살고 나답게 죽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를 찾고 아니 느끼고 소중히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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