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단편소설집 다섯 번째 이야기 : 고 래 집
다섯 번째 이야기 : 고 래 집
그곳은 모든 글이 태어나는 곳이자, 명작으로 영그는 곳이었다. 글 쓰는 이들의 성지이자 대문호들의 순례지인 그곳을 사람들은 경의와 존경을 담아 바라보곤 했다. 그곳의 이름은 고래집이었다. 대문에 작고 푸른 고래의 장식이 걸려있는 작은 글들의 공방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래집은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자리를 잡았었다. 언뜻 보기엔 고즈넉하고 아름답기만 한 이 바닷가 마을은 고래집이 들어서기 전부터도 두 가지 물품들 덕분에 일부 수집가들에겐 명성이 잔잔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장소이기도 했다. 고래와, 화석. 이 두 가지 물품은 무려 1200년 전부터 마을의 특산품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어쩌면 고래집이 이 마을에 자리 잡은 이유 자체가 이 물건들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고래집은 처음부터 고고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마을 속에서 그 역사를 시작했던 셈이다.
사람들은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마을 앞바다가 거대하고 너그러운 것들의 안식처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기록될 수는 없지만 토양에 새겨진 역사의 일부분으로 증명되는 것들이었다. 근처 다른 바다에서는 고래의 그림자도, 흔해빠진 용들의 발자국 화석이나 앵무조개들마저도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마을 앞바다에서는 화석과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넘치도록 발굴되었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의 벽난로나 창가가 그들의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들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뼛조각들로 장식되어있을 정도로 마을에는 화석이 풍부했다. 외지인들이나 고생물학자들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역사의 보석들이 이 마을에서 만큼은 민들레나 개똥지빠귀보다 하등 나은 취급을 받기 어려울 정도로 흔했던 셈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 퇴적되어온 바다 생명체들의 역사는 마을 앞바다를 기나긴 이야기의 장으로 만들어놓았다. 시간의 퇴적물들은 단순히 화석이나 돌에 새겨진 날카로운 자국들로만 전해져 온 것이 아니라 관습이나 본능과 같은 무형의 각인으로도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었다. 거대한 혹등고래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해 선조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마을 앞바다를 찾았고, 현명한 수염고래들은 선조들의 무덤을 찾고 그들 자신의 영면을 맞이하기 위해 절벽 너머의 깊고 신비스러운 장소들에 몸을 뉘었다. 다른 곳에서는 거의 만날 수 없는 신비로운 뿔돌고래들과 보석처럼 새하얀 백돌고래들 마저도 마을 앞의 신비로 가득한 검은 바다를 그들의 고향이자 터전으로 삼았으며, 똑똑하고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범고래들마저도 이 바다에서는 잔잔하게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역사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고래들은 파도와 안개를 닮은 신비한 모습으로 마을을 담은 해변과 공존했다. 그 사이에서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은 인간과 그들의 역사뿐이었던 셈이다.
한 때는 마을 주민들이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포경업이니 고래 도축업을 한다고 시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잔인하고 강경했던 이들마저도 곧 고래를 죽이는 것이 자신들의 일부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바다의 슬픔이 마을을 물들이자, 깊이 없는 모든 유행이 그렇듯 포경업을 하던 이들 역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졌다. 남은 것들은 그 흔적들뿐이었다. 억겁의 세월 동안 바다에 쌓이고 마을을 둘러싼 뼈들. 화석도 뼈였고, 포경업의 부산물도 뼈였으며,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고래들의 무덤도 역시 뼈일 뿐이었다. 마을은 뼈로 둘러싸이고 뼈 위에 지어졌으며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본질의 무덤이었다. 그리고 그 본질의 무덤가에서 글이란 꽃이 피기 시작했다.
글은 고래집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실 고래집이 정확히 언제, 그리고 왜 생겨났는지는 마을의 가장 나이 든 어르신들조차도 알 수 없었다. 식료품 가게나 술집과는 달리 공방은 마을 모두에게 필요한 시설은 아니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고래집이 생겨났을 때 그곳을 신경 쓰지 않았다. 더군다나 고래집이 터전으로 잡은 곳은 마을에서도 꽤 떨어진 절벽 위였다. 물론 공방의 주인들이 가끔 마을로 내려와 식료품을 사거나, 해변에서 화석과 고래 뼈들을 뒤적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크게 수군거릴 이유는 없었다. 공방 주인들은 뼈를 뒤적이다가 조용히 절벽 위로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 역시 잊혀질 때쯤 되면 한 번씩 나타나는 조용한 예술가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고래집은 마을의 일부이면서도 고립된 독특한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고래 집을 ‘특별한 곳’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곳은 이미 허옇게 먼지 쌓이고 고풍스럽게 나이 들어있는 장소가 되어버린 채였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그마저도 ‘처음부터 오래된 기억을 가지게 해 준 마법 같은 장소’라고 칭하며 신비로워했지만 말이다.
이 놀라운 장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어느 인터뷰로부터 시작되었었다. 인간의 생존과 존재성을 다룬 위대한 해양 명작 ‘노병과 바다’를 쓴 이웨헤밍은 어느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제가 노병과 바다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고래집 덕분입니다. 그곳에서의 경험과 그곳에서 만들어준 만년필이 없었다면 저는 결코 그 글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 글은 제 작품이 아닙니다. 고래집의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대문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낮추어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의아함과 호기심을 느꼈고, 그것은 곧 고래집에 대한 지고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고래집에 대한 고마움 가득한 폭로는 단 한 번의 인터뷰나 단 한 명의 작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자연과의 깊은 공감과 교감을 토대로 ‘월돈’을 쓴 작가 헬리 로소는 그의 부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고래집에서부터 비롯되었노라고 토로하였다.
“나의 모든 경험과 교감은 한 자루의 만년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 펜을 잡은 순간 나는 스쳐 지나간 바람을 비로소 글에 담아낼 수 있었고, 부딪히는 바다와 육지를, 봄을 쓰다듬는 꽃잎의 웃음을 표현할 수 있었소. 월돈은 그 경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소.”
“그랬단 말이에요? 어디서 난 만년필이었는데요?”
“고래집이라는 작은 공방이었소. 내 모든 것이 비롯된 곳이지.”
로소의 사후에 그의 아내는 로소가 했던 이야기들을 모아 책을 내었고, 그 안에 담겨있는 고래집에 대한 선망과 그리움은 다시 한번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 뒤로 사람들의 열띤 추리와 추적은 고래집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매일 새로이 밝혀내기 시작했다.
전설이 될 마법사 이야기를 쓴 앤 조 링로도, 불멸의 사랑을 그린 브란테론 자매들도, 가장 아름다운 시를 썼다는 시성 비이룸과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는 안토니오 체홈 조차도 모두 고래집에서 만든 펜으로 글을 썼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일기로, 편지로, 수기와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로 고래집의 펜이 있기에 글을 쓸 수 있었음을 찬양하고 암시했다. 꽉 막히고 우울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들 삶의 모든 것이 그 펜들을 움켜쥐면서 달라졌던 것이다.
그 뒤로 고래집은 글 쓰는 이들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글을 쓰고 싶은 모든 꿈나무들은 살면서 한 번쯤은 꼭 고래집을 찾고 싶어 했고, 그곳의 만년필을 소유하는 것을 평생의 의미로 삼았다. 그 누구도 고래집의 만년필을 갖게 되면 영원불멸의 걸작을 쓰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장구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계에는 수많은 대문호들이 출현했다가 사라졌고, 그들은 모두 고래집의 만년필이나 펜을 한 자루씩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의미들이 그 오래된 공방에는 쌓이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고래집은 만년필을 많이 파는 공방은 아니었고, 덕분에 고래집의 주문은 상시 밀려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맞춤 제작한 만년필만을 팔았으며, 심할 때에는 한 자루의 만년필을 만드는데 십수 년이 걸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실성의 시대’라는 작품으로 당대 최고의 문호로 불리게 된 무라카키 하루미 역시 장장 12년의 세월 동안에도 고래집의 만년필을 아직 받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일반인이 받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대문호로 인정을 받은 하루미가 굳이 고래집의 만년필을 사려고 하는 것 자체가 노년의 욕심이며, 그 때문에 고래집의 만년필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누구도 하루미가 만년필을 아직 받지 못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하루미 역시도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장장 12년의 세월 동안 고래집의 만년필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이마저도 고래집이 가진 수많은 전설의 일부가 되기에는 충분한 일이었을 것이다.
맞춤 제작형 만년필만을 판매하는 대신, 고래집은 이미 고래집에서 선물한 만년필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변주’를 제공해주었다. 이 변주는 본래의 만년필과 똑같은 글의 정수를 지닌 새 제품을 제작해주는 것으로, 재질이나 외양은 바뀌어도 글을 만드는 그 특별한 본질은 그대로 간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반지의 여왕’을 쓴 제이 토르킨은 111번 종류의 변주를, 위대한 흡혈 악마의 전설을 쓴 아브라함 스토커는 108개의 변주를 받은 것으로 유명했다. 대신, 변주를 받는 작가들은 반드시 원본이 되는 만년필을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위대한 작가들은 원하는 숫자만큼의 새로운 만년필을 디자인을 바꿔가며 받을 수 있었지만, 원하는 개수만큼의 만년필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한 번에 한 개, 일인일인 (一人一刃)이었을 뿐이었다.
변주와 교환되며 공방으로 회수된 원본 펜들은 공방에 전시가 되었다가 구매를 원하는 수집가가 있으면 팔려나갔다. 원본 만년필을 소지하기 위해선 작가여야 했지만, 이미 마법이 다한 펜들을 구매하거나 수집하기 위해선 반드시 작가일 필요는 없었다. 고래집 공방의 마법은 한 펜당 단 한 권의 책을 집필할 때만 발휘되었고, 그 뒤에는 마치 소진이라도 되어버리는 마냥 멋진 글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을 집필한 펜을 큰돈을 주고 구매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법이 필요해서 고래집의 만년필들을 사랑하고 욕망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작을 쓸 수 없다고 해도, 마법이 소진되었다고 해도, 고래집에서 만든 만년필들은 그 자체로 인기가 많았다. ‘이웨헤밍의 첫 번째 만년필’이나 ‘샬럿 브란테론의 두 번째 볼펜’ 같은 유명한 펜들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집 수십 채 가격으로 거래되었고, 일부 위대한 작품들은 감정 병기나 함선급의 가격으로 거래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래서 고래집에서 새 펜이 만들어질 때면 그것이 원본이던 변주이건 상관없이 전 세계의 관심이 드높아졌다. 원본 펜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세상이 또 한 명의 대문호를 맞이한다는 것이었고, 변주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수집가들을 위한 새로운 펜 한 자루가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사람들이 더 기대하는 것이 둘 중 어느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사람들이 고래집의 펜에 대해서 열광하고 열망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이었다.
고래집의 당대 공방 주인 아담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그가 ‘젊다’는 것이었다. 아담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든 사람의 기억 (심지어 고대 문헌을 통틀어서도) 역대 공방 주 중에서 길고 하얀 턱수염이 없는 공방 주인은 아담이 유일했다. 젊다는 평가에 걸맞게 아담은 활기차고 영명했으며, 그러면서도 공방 주인에 어울리는 진중한 현명함으로 전설적인 공방을 단신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수염이 없는 탓인지 아담은 역대 공방주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독창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아담은 제 이십이 대의 공방주로 취임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아서 전 세계의 모든 글쟁이들과 독자들을 놀라게 할 발표를 꺼내놓았다.
『고래집 공방은 이 시간부터 ‘별철’을 새로운 만년필 재료로서 사용합니다.』
이십이 대째 내려오는 고래집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역대 공방주들이 사용해온 재료는 단 두 가지, 마을 앞바다에서 발견되는 고래의 뼈와 화석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재료만으로도 고래집은 공방으로서의 그 명성을 쌓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담의 이 새로운 시도에 대해 다양한 염려와 우려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고래집 앞으로 배달되어온 우편물은 우려로 이루어진 글들의 산과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담은 세간의 평가나 염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곡괭이 하나만을 짊어진 채로 마을 근처의 황야로 떠났다. 그 황야에는 운석이 떨어져 생긴 별꽃과 별철이 아주 많았고, 아담은 아주 정성스러운 태도로 그것들을 채취했다. 그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을 그러모아 만든 아담의 첫 번째 펜은 파랗고 까만 밤하늘의 기운을 담은 채로 어느 우주비행사에게 건네어졌다.
1년 뒤, 우주비행사가 불시착으로 사망한 슬픔의 장소에서 사람들은 별철로 만들어진 만년필과 그것으로 쓴 공책 한 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에 ‘어린황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 짧은 글은 전 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람들은 별철로 만들어진 펜에는 기존의 화석이나 고래뼈 펜들과는 다른 글을 만들어내는 매력이 있음을 새로이 발견했다. 고래뼈로 써진 글들은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고, 화석으로 만들어진 글들은 무거우면서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별철은 신비로우면서도 위태로운 ‘신세대적인 감수성’을 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신세대적인 감성’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느 언론사에서 그 표현을 대서특필 한 뒤로는 그것이 별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수식어로 자리를 잡고 말았고, 모두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아담의 두 번째, 세 번째 별철 만년필들에 대해 지고한 관심을 가졌고, 그 만년필들이 반짝이고, 유려하며, 상상을 자극하는 데다가, 잔잔히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글들을 연거푸 써내자 더 이상 아담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은커녕 되려 별철 만년필이야말로 글쓰기의 역사를 바꿀 위대한 – 혹은 너무 늦은 – 발견이라고 칭송할 지경이었다. 아담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조용히 웃음 지으며 계속해서 만년필을 깎았다. 더 이상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아담은 차분하게 그의 본분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적어도 지난주 목요일의 재난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가 그럴 수 있었다는 의미다.
“계세요~!”
하는 소리와 함께 돌풍 같은 진동이 공방을 뒤흔들었다. 아담의 골칫거리인 피어는 대답은커녕 본인이 만들어낸 질문의 여파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공방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상태였고, 덕분에 고래집 내부의 흔들릴 수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흔들리고 있었다.
고래집은 그렇게 큰 공방이 아니었는지라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 카운터 – 이자 아담이 앉아있는 자리 – 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곳에 앉은 채로 이미 약 3분 동안이나 피어가 뛰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아담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피어야. ‘계셔요-’는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은데. 너는 어차피 계시든 안 계시든 일단 박차고 들어오지 않니. 들어오면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게 보일 테니 더더욱 물어보지 않아도 좋을 거고.”
“에이 그래도 계시냐고 물어는 봐야죠! 엄마가 남의 집 들어갈 때는 꼭 인사하는 예의를 갖추랬어요!”
아담은 ‘자당께서 가르쳐주신 예의에 대문에 자국이 남을 정도의 발길질로 문을 여는 것이 포함되어있었니?’ 하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억눌러 참았다. 그간의 경험에 미루어보건대, 이 말괄량이 소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손님이 있고 없고를 신경 쓰지 않고 한없이 수다스러워졌고, 해가 질 때까지 공방 구석에 틀어박혀서 대화 상대가 되어줘야 할 것이 자명했다. 아담은 구겨진 얼굴을 펴 억지 미소를 띤 채로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니 피어야?”
“아저씨가 준 펜! 이거 별로예요. 난 이게 고장 난 거라고 확신해요!”
위대한 공방의 촉망받는 젊은 주인은 하마터면 어린 소녀에게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릴 뻔하고 말았다. 고래집의 만년필은 고장 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피어가 반쯤 강탈하다시피 가져간 저 만년필은 그가 빌려줄 수 없다고 두 번 세 번씩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어가 떼를 써서 가져간 물건이었다. 피어가 추리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만년필을 내놓으라고 했던 것은 고작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아담은 극구 거부를 하다가 결국 아드가 알른 퍼의 12번째 만년필을 내어주었었는데, 피어는 고작 5일도 지나지 않아서 이것을 고장 났다며 불평하기 위해 들고 왔던 것이다. 추리소설의 거장인 에드거 알른 퍼의 열두 번째 만년필은 오래된 흑수염고래의 날개뼈로 만들어진 명품 중의 명품이었고,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날카롭고 기묘한 필기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아담은 마을 의사의 조언에 따라 관자놀이 부근을 천천히 주무르며 혈압을 낮추곤, 피어가 건네준 펜에 원래는 없던 말라붙은 우유 자국과 빵가루를 털어낸 뒤, 고래집 특유의 고대 오징어 먹물 잉크를 주입하여 한 문장을 써보았다.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다오.』
펜은 고래집이 자랑하는 첫 번째 대문호의 가장 위대한 문장을 긴장감 넘치는 필체로 유감없이 표현해냈다. 매끄럽고 단단한 그 문장에서는 고장 난 것 같은 구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아담은 담담한 표정으로 소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만년필 잘 나오는데 왜 그러니?”
피어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불만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잉크야 당연히 잘 나오겠죠! 글이 안 나와요 글이!”
“글이 안 나온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아저씨가 그 펜으로 유명한 추리소설들이 많이 쓰였다고 했잖아요! 하얀 고양이니, 황동 풍뎅이니 하는 글들도 다 그걸로 썼다고!”
“그랬지.”
“아저씨는 그 글들 다 읽어보셨죠? 얼마나 재미있는지도 잘 아시죠?”
“그렇지.”
“그럼 제가 쓴 것도 한번 읽어보실래요?”
“좋지.”
아담은 피어가 건네준 공책을 두어 페이지 넘겨본 뒤 읽어보는 것에 대해 ‘좋지’라고 대답한 자신을 후회했다. 그것을 읽어보는 경험은 그다지 좋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공책 두어 페이지를 가득 메운 피어의 습작은 글이라기보다는 단어의 나열 같은 느낌이었고, 아담은 그 안에서 자신이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러 단어들도 여러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맞춤법 실수이거나 피어가 상상해냈을 것이 분명한 그 단어들은 제각기 저마다의 성질을 가지고 공책의 이야기를 사선으로 넘어 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공책 속의 모든 단어들은 보편적인 문장들처럼 시실과 날실처럼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해놓은 날 놀이터에 풀어놓은 아홉 살 아이들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난동을 부려 의미를 만들고 있었다. 아담은 황당해하며 말했다.
“그래. 확실히 이건 글이 아니네. 하지만 그건 펜이 고장 난 건 아니지 않니.”
“여기서 만든 펜으로는 위대한 작품들이 써진다면서요!”
아담은 그 사실에 대해서 대답을 하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고래집의 마법에 대해선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아담은 여지껏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 이 이야기가 끝낼 때까지 잠자코 상대방을 기다려주었다. 아담의 때 이른 침묵 덕분에 피어는 한참 동안 이 펜이 불량품이네 아저씨가 순진한 소녀에게 사기 쳤네 고래집 명성도 이제 끝이네 하고 누가 들으면 큰일 날만한 소리로 고래집의 처마 아래를 고래고래 흔들어댔지만 결국 제풀에 지쳐 잠잠해지고 말았다. 아담은 이 대책 없는 열두 살 소녀를 애증을 담아 바라보다가 결국 장식장에서 펜을 한 자루 더 꺼내 주었다.
아담이 장식장에서 꺼낸 것은 뿔돌고래의 뿔 끝으로 만든 아름다운 하얀색 만년필이었다.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시안 크리스틴의 만년필이었던 그것은 수많은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작품이자, 그 유명한 ‘오리엔트 입석열차 살인사건’을 쓴 역사적인 펜이었다. 수많은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이 애장품을 아담은 마치 길거리에서 주운 조약돌을 건네는 식으로 평이하게 피어에게 쥐어 주며 말했다.
“그럼 이걸 한번 가져가 보렴. 이건 좀 나을지도 몰라.”
피어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것도 추리소설 쓴 사람의 펜이에요?”
“응. 그렇지.”
“그럼 싫어요.”
“왜?”
“추리소설은 질렸어요. 난 추리소설을 쓸 수 없다고 확신해요. 써보니까 피와 살인이 가득한 이야기는 나와 맞지 않아요! 저는 예쁜 동화를 쓸거라구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요.”
아담은 포기가 너무 이른 것은 아니냐며 한마디 질책을 하려다가 생각을 고쳤다. 대신 그는 하얀 만년필을 다시 장식장에 넣으며 이번에는 파란색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만년필을 꺼냈다. 밤하늘처럼 찬란하게 어둡고, 별빛처럼 신비하게 푸르른 그 만년필은 고인이 된 안타까운 비행기 조종사, 세인트엑쥬페리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펜이며, 그 유명한 ‘어린 황제’를 집필한 별철 펜이었다. 이 역시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문학 역사의 획을 그은 펜이었지만 아담은 무덤덤하게 피어에게 건네었다.
“그럼 이걸로 써보는 건 어떠니.”
피어는 만년필의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자태에 황홀한 표정으로 빠져들었다. 만년필을 이루는 별철도, 피어의 눈빛도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피어는 마치 갈매기가 과자를 채가듯 펜을 아담의 손에서 낚아채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탄성을 내지르는 피어를 보며 아담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피어는 감사의 인사를 고래고래 소리치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너무 예뻐어어어!! 고마워요 아저씨이이이!!”
피어가 사라진 자리에는 문에 걸린 종소리만이 뎅그렁거리는 메아리가 되어 남아있었다.
피어는 4개월 동안이나 고래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소녀가 무려 4개월 동안이나 오지 않자 아담은 반쯤은 안도를, 반쯤은 걱정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식료품이 떨어진지라 마을에 들려야 했던 아담은, 식료품 가게 주인인 털북숭이 장에게 피어가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아담은 망설이지 않고 빵과 수프를 든 채 피어네 집을 방문했다.
창백한 안색의 피어는 침대에 누워서 아담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 피어. 아프다고 들었어.”
“네 맞아요. 제가 많이 아파요.”
“펜을 빌려간 게 초봄이었으니 벌써 사 개월이나 지났구나.”
“벌써 그렇게나 되었나요...? 쿨럭. 반납이 늦어져서 죄송해요.. 제가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팠어요.”
“그래그래. 다 들었단다. 글은 많이 썼니?”
피어는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침상 옆에 놓인 공책을 아담에게 밀어주었다.
“아저씨 덕분에.. 쿨록.. 만족할만한 글을.. 콜록..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저는 정말로 기뻤어요.. 쿨럭 콜록..”
아담은 공책을 펼쳐 마지막 장미꽃잎이 떨어지면 목숨이 달아나는 어여쁜 미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꼼꼼히 읽었다. 그는 꽃다운 소녀를 위해 벽에 장미꽃을 그려준 화공의 마음 씀씀이에 대해서 꽤 깊은 고찰을 해야만 했다. 그가 책을 덮었을 때, 피어는 서글픈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저 장미꽃이 다 떨어지면 죽겠죠..? 하지만 제겐 그림을 그려줄 화가 아저씨가 없네요.. 아저씨는 만년필 밖에 만들 줄 모르는 바보니까..”
아담은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잘 쓰긴 했는데 이건 표절이잖니 피어.”
피어는 어떻게 그렇게 부당한 소리를 할 수 있냐는 눈빛으로 항변했다. 눈빛이 불길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애써 쿨룩쿨룩 기침을 하는 모습에 아담은 참 여러모로 기가 차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이건 오 헨릴의 마지막 낙엽을 고대로 가져다 베낀 이야기인걸. 그 작품도 우리 공방에서 만든 펜으로 쓰였는데 설마 내가 모를 줄 알았니?”
“거기 나오는 건 낙엽이잖아요! 제 이야기에선 분명 장미꽃잎이 떨어진 다구요! 둘이 얼마나 다른 지도 몰라요?”
“그래. 그리고 죽어가던 평범한 소녀인 주인공도 여신도 울고 갈 미소녀로 바꿔놓았지. 하지만 피어야. 그렇게 사소한 의미들을 입맛에 맞추어 바꾼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란다. 그리고 새로 쓰이는 글은 본질을 쓰는 것이어야 해. 본질이 같으면 표절일 뿐이지.”
“몰라요.. 아저씨 저 아파요... 쿨럭... 이히 슈테르베.. (Ich Sterbe..)”
“아이고오. 그만하렴 피어야. 식료품 가게 장이 다 말해줬단다. 너 어제 황야 연못 근처에서 애들하고 놀다가 그 안에 빠져서 감기 걸린 거라면서? 내일이면 팔팔하게 뛰어다닐 거면서 왜 비련의 여주인공 인척 하는 거니?”
“그걸 다 아는데 여긴 뭐 하러 왔어요!”
피어는 토라진 채로 고개를 팩 돌렸고, 아담은 몰래 쿡쿡 웃었다.
“써보니까 동화도 힘들지 피어야? 안 써지니까 남의 이야기를 따라 하게 된 거고.”
피어는 대답하는 대신 이불을 한 번 걷어찼다. 그것이 무언의 – 그리고 꽤 폭력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열두 살 소녀의 행동으로는 납득할만한 – 긍정임은 아담도 알고 피어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담은 제안했다.
“감기가 다 나으면 다시 한번 공방에 들리렴. 그때는 동화용 펜 말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 이야기가 표절이기는 했지만, 글 솜씨는 꽤 괜찮았단다. 특히 소녀의 감정표현에 대한 것은 헨릴 본인보다도 나았다고 칭찬해주고 싶구나. 그 친구는 연애경험이 없어서 소녀의 감정을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슬프게만 표현했거든.”
피어는 이불에서 두 눈만 빼꼼하니 내밀고 말했다.
“저한테 화 안 났어요?”
“물론 화가 나기는 했으니 잘 들으렴. 황야의 연못에는 소떼들의 똥이 녹아있어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된단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냄새가 몸에 배어들거든. 아유 정말 이런 냄새가 난다니 화를 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을 지경이란다. 이불을 덮어도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니 앞으론 거기에 빠지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피어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이불속으로 숨어버렸고, 아담은 쿡쿡 웃으며 소녀의 이불로 된 성채를 다독여줄 수 있었다.
피어는 삼일 뒤, 입술이 댓 자는 나온 뾰로통한 상태로 공방을 찾아왔다. 아담은 ‘잘 씻었는지 이제 소똥 냄새가 좀 덜 난다’고 농담을 했다가 하마터면 장식장이 넘어갈 뻔하는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피어는 이번에는 연애소설을 써보겠다고 제이나 오스텀의 저명한 ‘욕망과 아편’을 작성한 펜을 가져갔고, 9개월 뒤에 13살의 두 남녀 주인공이 독약으로 자살하는 비극적 연애소설을 써왔다. 이딴 글은 길거리 강아지도 안 읽을 거라며 자발적인 비판에 난동을 곁들인 피어를 달래기 위해 아담은 ‘먼 미래에는 추앙받을, 시대를 앞선 작품’이라는 화려한 칭송을 사용해야만 했다.
피어는 조금 진정한 뒤에 이번에는 극작품을 써보겠다고 위대한 체홈의 ‘세 남매’를 쓴 혹등고래 꼬리뼈로 만든 무거운 만년필을 들고 갔으며, 1년 3개월 뒤에 꽤 쓸만한 극작품을 들고 왔다. 폭풍과 마법사에 대한 흥미로운 극본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글들을 읽고 작품들을 빚는 원동력을 만들어온 아담이 보기에도 피어가 마지막으로 들고 온 극작품은 꽤 괜찮은 것이었다. 동생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외딴섬에 살게 된 위대한 마법사와 그의 딸,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정령과 요정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담은 피어의 작품을 다시 한번 더 꼼꼼히 읽어본 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개의 펜을 더 추천해주었다.
“자, 어쩌면 이게 네가 찾는 마지막 펜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이제는 제법 글을 잘 쓰니 말이다.”
글 속에서 어느덧 어린 소녀티를 벗고 사춘기 소녀로 성장한 피어는 호기심 가득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으로 아담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선사시대에 존재했던 거대한 해룡의 두개골로 만든 회색의 만년필을 장식장 깊은 곳에서 꺼내어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피어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이 펜은 뭐예요? 누가 썼던 펜인지 궁금해요.”
아담은 말없이 손안에 들린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이 펜이야말로 고래집의 비밀이자, 장구한 역사 동안 숨겨온 본질이었다. 이 만년필에 얽힌 비밀을 아는 사람은 공방 주인인 아담뿐이었다. 그리고 아담은 피어에게 펜을 건네며 마침내 그 오래된 신비를 풀어낼 수 있었다.
“오래전, 우리 마을에는 홉이라는 한 개구쟁이 소년이 살았단다. 장난기로도 호기심으로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아이였지. 고래집에 아무도 관심을 보내지 않았던 그 첫 순간부터도 그 아이는 밤낮없이 이곳을 찾아와 놀다가곤 했단다. 고래집에게 있어선 첫 손님이었던 셈이야.”
“마치 저 같은 아이였군요!”
“그래. 마치 너 같은 아이였지. 초대 공방주께서는 그 아이를 어여삐 여기셔서 이 만년필을 선물하셨고, 그 아이는 지금 네가 앉아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글을 쓰곤 했단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원본 만년필을 받은 거네요?”
“그렇지. 그때 그는 열여섯 살이었단다. 공방의 만년필을 받은 사람 중에선 가장 어렸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최초의 손님이자 가장 어린 손님이었던 셈이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었겠군요. 그는 어떤 작가가 되었죠? 어떤 위대한 책을 써냈나요?”
“그 아이는 레비아탄이라는 위대한 책을 바로 그 펜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썼단다. 이 마을이 담고 있던 모든 신비를, 안갯속의 두려움과 고래뼈를, 멸종된 것들의 아우성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담아낸 책이었지. 고대 바다를 괴수와 괴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그 책은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한 현서이기도 했단다.”
“아주 멋진 소설이었겠네요.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환상소설이었나요? 마침 환상소설을 써보고 싶었는데! 제 마음을 읽으셨군요!”
“환상소설이라니? 그건 정치사상서였는데?”
피어는 마치 까만 콩 샐러드를 먹었을 때에나 지음직한 표정을 그에게 지어 보였다. 아담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의 표정에 대답하였다.
“물론 정치사 상서를 쓰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너무 걱정 말려무나.”
“그렇죠? 제가 무슨 정치사 상서를 써요. 생각만 해도 싫어요.”
“홉은 스물아홉 살에 마을을 떠나서 위대한 정치인이자 사상가가 되었단다. 하지만 펜은 마을을 떠나기 직전에 공방에 반납했지. 마을을 떠나서 위대한 인물이 되기 한참 전에 이미 레비아탄을 다 썼었던 거야.”
“음... 근데 그 펜을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정치사상서를 쓰라는 건 아니라면서요!”
아담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건 바로 이 펜에는 한 가지 비밀이 더 있기 때문이란다. 그 비밀이야 말로 내가 너에게 이 펜을 추천해주는 이유인 셈이지. 홉이 떠난 지 200년의 시간 동안 이 만년필은 공방의 장식장 안에서 잠들어 있어야 했단다. 홉을 닮은 또 다른 개구쟁이 소년이 마을에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지. 그 아이도 마치 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공방 문을 두드리는 아이였단다. 멜빌이라는 이름의 아이였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니?”
“아? 멜빌이요? 그 사람은 알아요! 학교에서 들었는데! 고래집 만년필로 대작을 쓴 최초의 대문호가 멜빌이라고 했어요!”
“그래. 바로 그 멜빌이란다. 멜빈은 홉이 썼던 바로 그 펜을 받아가서 위대한 소설을 썼단다.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개구쟁이가 위대한 작품을 써낸 것이지. 거대한 푸른 고래와 복수, 신화와 인간의 역사를 넘나드는 위대한 여정이었단다. 그리고 그 이야기 역시 고래집의 다른 만년필이 아닌 바로 이 펜으로 쓰였었지.”
피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놀라며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펜의 마법은 단 한 번만, 만들어진 사람을 위해서만 작용하는 거 아니었어요? 어떻게 200년에 걸쳐서 두 사람이 같은 펜으로 작품을 쓸 수가 있어요?”
아담은 부드러운 미소로 피어에게 마침내 고래집의 가장 큰 비밀을 털어놓았다.
“피어야, 사실 글의 큰 마법은 펜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 말을 들은 피어는 토끼처럼 눈이 땡그래지며 물어보았다.
“그럼요? 그 고대 오징어 먹물 잉크의 마법이었나요?!”
아담은 다시 한번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을 써보렴. 이 펜으로 쓴 작품마저도 너의 마음에 든다면 그때는 말해줄게. 아마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피어는 머뭇거리다가 정중한 태도로 두 개의 위대한 작품을 낳은 펜을 잡아들었다. 그녀는 꽃잎처럼 부드럽게 공방의 문을 나섰고, 아담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아담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자신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기로 마음먹었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 뒤 다시 봄이 왔다. 그 봄마저도 다시 가시고 유채꽃이 장미로 바뀔 때 까지도 피어는 고래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담은 조금도 조급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아담은 황야에서 자그마한 별철 조각을 모으고, 하얀색 향유고래의 갈비뼈를 세공했다. 향유고래의 뼈에 장인의 손길이 닿자 오래된 흑단 나무를 가공한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흑갈색이 스미었다. 아담은 그가 찾는 밤하늘의 색이 나올 때까지 긴 시간을 다듬고 손질했다. 어느샌가 고래의 갈비뼈는 밤하늘을 머금은 나무의 빛을 띠고 있었다. 밤하늘처럼 까만 만년필 손잡이에는 수천수백만 년 전에 바다를 밝혔던 앵무조개들의 보석 같은 눈이 일곱 개 자리를 잡았다. 세월을 초월하며 영원처럼 빛나는 앵무조개의 눈들은 흑단 같은 고래뼈 위에서 별이 되어 있었다. 아담은 조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다시 가을이 찾아오고 겨울이 찾아왔을 때, 아담은 별철에 순금을 섞어 펜촉을 만들기 시작했다. 두 영롱한 금속은 부드럽게 어우러지며 어느 소녀의 눈빛 같이 빛났다. 아담은 빛의 물결무늬를 담은 펜촉 위에 세상 단 두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문양을 상감하여 넣었다. 무늬는 작았고, 아담은 마치 시계 세공사 같은 세심함으로 천천히 의미를 새겼다. 완성된 펜촉은 아담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펜대에 펜촉을 끼우고, 고래집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래의 향수와 상어의 기름, 수각룡의 먹물을 섞은 마법의 잉크를 채워 넣자 비로소 한 사람만을 위한 만년필이 완성되었다. 아담은 그 만년필을 장미목으로 만든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고 다가올 봄과 샛노란 꽃들을 기다렸다. 그는 봄이 다시 피어날 때 피어가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비록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확신이지만, 아담의 삶이 그에게 건네어준 직감이 어려 있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봄꽃이 가장 화려하게 만개하던 그날에, 피어는 절벽 가득 핀 노란 꽃 사이를 걸어서 고래집을 향해 다가왔다. 햇살을 가득 안아 여신처럼 빛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담은 아주 멀리서 부터도 선명하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피어의 손에는 다 쓰인 한 권의 책이 그녀의 자부심처럼 견고하게 들려있었다.
아담은 그녀가 해냈음을 확신하며 밤하늘을 닮은 만년필을 꺼내 두었다. 이제 큰 필요는 없을 테지만, 그 펜은 피어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아담은 피어에게 그 펜을 만들어줄 수 있어서 기뻤다.
피어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햇살 같은 웃음으로 아담에게 책을 건네었다. 아담은 설렘을 담은 시선으로 그 공책의 제목을 읽었다. 바다를 닮은 푸른 공책 표지 위에는 은색의 단정한 글씨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라고 적혀 있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