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안개꽃 핀 연못에서
그 아이를 처음 만났던 것은 밤톨만큼 어리고 햅쌀만큼 반짝이던 어렸을 적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일곱 살의 세례식날에 나는 그 아이를 처음 만났었다.
그 날은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었다. 할머니께서 세례 선물로 주신 검은색 묵주팔찌는 그날 처음으로 내 손목 위에 가지런한 빛을 뽐냈다. 하지만 귀한 돌로 만들어졌다던 그 팔찌는 어린 내겐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장신구였을 뿐이었다. 그날 성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팔목이 떨어져라 소란을 피워대는 나를 보고 듣고 혀를 쯧쯧 찼다. 그 소란은 나와 그 아이를 이어준 최초의 소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호기심으로 별빛 같은 눈을 빛내며 그 아이는 소동의 중심으로 찾아왔고 떼를 쓰고 팔찌를 빼려고 난리를 치는 내 모습에 맑은 웃음을 띄워냈다.
“엄마 쟤 봐! 쟨 말썽 부려!”
그 웃음과 놀림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결국 떼쓰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반짝이는 팔찌를 소매 속으로 숨기며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 아이를 처음 바라보았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14년 전, 어여쁜 성당에서의 일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할머니께서는 내가 독실한 신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참 반항기 많은 유년기를 보냈던 나는 성당에 가는 것도,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싫어서 매주 툴툴댔지만 그런 철없는 손자에게 할머니께서는 다만 한없는 사랑으로 미소를 건네셨을 뿐이었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따스함이 있다. 할머니의 사랑은 철없는 내 마음에도 부드럽게 전해졌고, 할머니의 애정 어린 기대를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매주 성당을 나갔다.
매주 주말 발걸음이 성당을 향할 때마다 묵주 팔찌 역시 손목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성당뿐만이 아니라 샤워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뛰어놀 때에도 차고 다녔으니 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던 셈이다. 물론 아직은 신을 알기에도, 신에게 의지하기에도, 심지어는 신을 의심해보기에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신을 알 수는 없더라도 곁에서 노니는 참된 사랑을 알 수는 있었다. 신앙을 위해서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음이 나를 성당으로 보냈다. 그것은 참 오래도록 내가 삶을 살아간 방식이었다.
성당에는 그 여자아이가 있었다. 내가 매주 주말 성당에 가듯 그 여자아이도 매주 성당으로 왔다. 가까운 사이가 된 건 그 후로부터 한참이나 이후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미 그때부터 서로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던 셈이다. 물론 자주 마주친다고 한들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었던 나날들이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아주 긴 시간과 곧은 인내가 필요한 법이고 너무 어린 우리에겐 그런 축복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 아이는 철없고 소극적인 내 모습들을 잘 이해해주지 못했고 나 역시 삶의 기운으로 박동하는 그 아이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당돌한 말들은 때때로 내 마음에 생채기가 되어 맺혔고 그 아이 역시 쓸데없는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던 내게 짜증을 내곤 했다. 그건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며 숙적이 된 채로 조금씩 자랐다. 그것은 가장 어렸을 적에 서로를 눈에 담고 삶에 담은 아이들의 숙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딪히고 명멸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아주 느리게, 아주 천천히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물론 티격태격하기는 했을지언정 나는 한 번도 그 아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특별히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져주었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예의나 존중을 알기 훨씬 이전에도 나는 그 아이를 이기기는커녕 맞서 싸울 수 조차 없었다. 물론 말을 잘하는 그 아이에게 말싸움에서 밀렸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아이가 참 아프게 꼬집을 줄 알았던 탓이 더 컸다. 초등학교 내내 그 아이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서 누나 같았고, 힘으로 대들려고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팔뚝을 꼬집을 줄 알았다. 생살이 쥐어뜯겨나가는 그 극통에는 말싸움을 한없이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아픔의 비명 속에서 도망치다 보면 이기고 지고는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기 마련이다.
때로는 아파했고, 때로는 미워했지만 또 그만큼 많이 좋아하며 우리는 함께 얽혀 자라났다. 다툼과 애정 속에서 천천히 서로에게 닿아갔던 셈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선연이었다. 좋은 인연이라는 그 이름은 그토록 어린 날에 내 마음 위에 새겨져, 참으로 오랜 시간 내 마음이 닿고 싶은 장소가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성당에서는 매년 여름캠프를 했었는데 유독 그 해만큼은 캠프에 참가한 남자아이가 나밖에 없었다. 한창 발랄할 나이이던 여름캠프의 소녀들은 까르륵 대며 풀 죽은 나를 놀려대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여름 캠프에 지원한 것을 꽤나 후회해야만 했다.
여름캠프 내내 여자아이들은 갖가지 해괴한 부탁들을 해대며 나를 괴롭혔다. 청소를 할 때면 내 담당구역에다가 일부러 쓰레기를 뿌리며 뛰어다니기도 했고, 선생님들께 내가 하지도 않은 짓들에 대해서 고자질을 하여 영 난처한 상황들을 만들기도 했다. 종국에는 나를 괴롭힐만한 아이디어가 바닥났는지 저녁에 문을 잠그고 회의마저도 할 정도였다. 이 여자아이들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는지라 대체 무슨 작당모의를 하는 것인지 궁금하여 문 뒤에서 귀를 바싹 대보았지만 자그마한 여자아이들의 부드러운 소곤거림은 무거운 성당 나무문을 넘어오지 못했다.
여자아이들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회의에서 무엇을 결정했는지 알려주었고, 그것은 청천벽력처럼 나를 강타했다. 아이들은 나를 길잡이 겸 짐꾼 삼아 ‘탐험’을 가기로 결정했었다. 탐험이 뭔지도 몰랐고, 간다면 내가 고생할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당시의 내게는 어떠한 결정권도 반항을 할 권리도 없었다. 마치 소처럼,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매년 치러지는 성당 여름 캠핑 코스에는 그리 멀지 않은 뒷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가재나 개구리를 잡을 수 있는 작은 개울이 있었는데 그곳은 우리 모두가 즐겨 물놀이를 하던 장소였다. 시원한 물가에서 물놀이를 할 때면 소년소녀 모두가 치기 어린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어울려 즐겁게 놀 때면 어른들은 짐짓 비밀스럽게 그 개울 끝자락에 있는 비밀스러운 연못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연못은 사슴이 물을 마시는 작은 연못인데 정말 너무나 아름다워서 남녀가 함께 가면 사랑이 이뤄지고 때때로 요정이 나와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공주와 왕자를 꿈꾸고 영웅과 신화를 속삭이던 어린 시절이었다. 금도끼를 든 산신령이 쿨쿨 졸고 있거나 목욕하는 선녀를 훔쳐보는 나무꾼이 있을 것만 같은 그 연못은 모든 아이들에게 동경의 장소였다. 수많은 비밀과 전설들이 그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우리는 한없이 순수한 애달픔으로 그곳을 갈망했다. 나를 길잡이 삼아서라도 여자아이들이 그 연못에 가고 싶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곳에 닿으면 마치 만화영화처럼 진실된 우정과 행복이 찾아올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는 수련회 셋째 날에 일정에 지친 어른들이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탐험대를 꾸려 연못을 찾아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몰래 떠나기 직전 직전 여자아이들은 물티슈니 과자니 보온병이니 하는 온갖 짐들을 한가득 내 가방에 당당하게 넣었고, ‘왜 내가 이런 걸 들고 가야 해?’라는 내 항변은 비웃음 속에 묻혔다. 선연이는 ‘남자애가 너 혼자 뿐인걸.’라고 대답했고, 아직 남녀차별보다는 기사도에 익숙했던 어린 나는 무거워진 배낭에서 새어 나오는 툴툴거림과 함께 출발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무거운 출발과는 달리 탐험은 막상 떠나고 나니 순조로웠다. 여름은 더웠지만 수풀 사이의 개울물은 더위를 잊을 수 있을 만큼 시원했고, 너르게 뻗은 참나무 가지 사이사이에 맺힌 매미 울음소리는 여름 햇살만큼 따뜻하게 귓가에 머물렀다.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 밑에서 가재와 송사리가 분주히 도망 다녔으며 가끔 유리알 같은 모래알과 조약돌 같은 물방개가 숨겨진 보물처럼 물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다. 머리카락에 거미줄이 걸려 소리를 질러대면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려 자유롭게 해 주었고 모기가 가까이 오려고 하면 고사리 잎사귀가 장난기 어린 춤으로 쫓아내 주었다. 온 산을 친구 삼아서, 이름 모를 산새 울음소리를 길벗 삼아서 우리는 끊임없이 재잘재잘 발걸음을 옮겼다.
사건은 우리가 연못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일어났다. 개울을 따라서 계속해서 내려가던 우리를 가로막은 것은 무시무시한 절벽이었다. 물론 절벽이라고 해봤자 3미터도 안 되는 높이의 약간 가파른 경사에 불과했지만, 모험에 몰입해있던 11살의 우리에게는 무시무시한 장애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잠시 멈추어 머뭇거리다가 선발대를 먼저 내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선발대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내려가다 떨어져 죽으면 어떡해!”
그리고 그 누구도 3미터 남짓한 절벽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고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굉장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나를 뽑았다. 내 발언권은 새소리와, 새소리를 닮은 여자아이들의 야유 속에서 조용해져야만 했다. ‘가다 죽으면 니 책임’ 같은 무책임한 말들이 엄습하는 가운데 나는 절벽을 이를 악물고 기어 내려가기 시작해야만 했다.
다과회에나 어울릴 법한 탐험 물자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메고 이끼와 습기가 가득한 절벽의 경사면을 기어 내려가는 일은 영 쉽지 않았다. 물 묻은 이끼가 가득 자라는 절벽은 겨울의 빙판처럼 미끄러웠고 나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개울가의 거미처럼 가방과 절벽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외쳤다.
“도와줘!”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내 구조요청을 가뿐히 외면했고, 수군 수군대더니 절벽의 반대쪽으로 돌아 내려오는 것이 더 안전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나는 절벽 틈새에서 홀로 기어 올라가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투덜거리며 올라가려고 낑낑거리던 내 모습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내 가여운 몸무게를 지탱해주던 자그마한 절벽 귀퉁이는 곧 부스러지며 나를 웅덩이 깊숙이 내팽개쳤다. 서늘한 느낌과 함께 한여름의 차가운 웅덩이가 어린 내 몸을 사로잡는 가운데, 사건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내가 허리까지 빠진 웅덩이에서 벌떡 일어나 겨우 시야를 확보한 그 순간, 선연이의 ‘엄마!’ 하는 비명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선연이는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 웅덩이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뒤 그대로 얼굴부터 물속에 빠져들었다. 느릅나무도 삼킬 것 같은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고, 잔잔하던 깊은 산속의 물웅덩이는 삽시간에 두 번이나 사람 폭탄을 맞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웅덩이 속의 개구리들에게는 참 청천벽력 같은 날이었을 것이다.
절벽 위에 남아있던 여자아이들은 급하게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서둘러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 허우적거리는 선연이를 데리고 나오자 여자아이들은 소리소리 질러대며 걱정과 질책을 쏟아내었다. 선연이는 물에 빠지며 받은 충격으로 목이 쉬어버릴 듯 엉엉 울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그렇게 울어대면 남자는 11살 꼬마 건 90살 할아버지건 당황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진주처럼 온통 새하얀 아이가 흙탕물에 범벅이 된 채로 엉엉 우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물에 빠질 때 벗겨졌던 그 아이의 하얀 머리띠를 건져내어서 손가락으로 꼼지락대는 것이었을 뿐이다.
선연이의 엄청난 다이빙 이후 탐험대는 2개 조로 나뉘었다. 선연이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울어대고 있었다. 심지어 손짓 발짓으로 웅덩이를 가리키며 뭔가 꺼내야 된다고 울고 있었으니 모두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 안에 빠진 물건이 대체 무엇인지 까지는 해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와 현진이라는 여자아이는 두 번째 조로 편성되어 엉엉 울고 있는 선연이를 데리고 언덕 너머로 가는 임무를 받았다. 모두가 언덕만 넘어가면 목표하던 연못이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현진이는 그곳에 가면 분명히 씻을만한 깨끗한 물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나는 그 주장에 대해 특별히 반박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온몸에서 울음소리와 진흙이 스미어 나오는 것 같은 선연이를 어르고 달래며 우리는 언덕 너머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리고 현진이의 판단은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언덕 가득 하늘을 향해 살랑대는 대나무 숲을 지났을 때, 그곳에는 마술처럼 아름다운 연못이 나타났다. 그 연못은 세수하는 아도니스를 어디선가 아프로디테가 몰래 훔쳐보고 있을 것만 같은 장소였다. 물떼새 소리는 갈대닢에 부딪히며 영롱한 수면 위에 메아리쳤고 안개꽃은 수면 위에 자욱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상의 풍경이 아닌 듯 그 모습에 나는 엉거주춤 넋을 놓았고, 현진이는 내게 앙칼지게 소리 질렀다.
“야. 저리 안가?”
“왜?”
“이제부터 선연이 씻기려면 옷부터 벗겨야 하는데 옆에서 구경하려고?”
나는 크게 당황하여 순식간에 열 발자국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 아니.”
“저기 가서 누구 오나 망보고 있어! 뒤돌아보면 죽는다 너!”
현진이는 경멸을 담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나로선 그 시선을 뒤통수에 따갑게 받으며 멀찍이 떨어져 서있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바람이 갈대닢 부드럽게 흔드는 그 아름다운 장소에서, 내 마음은 야속하게도 콩닥콩닥 설레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돌아본다면 동화 속 풍경 같은 장면을 눈에 담게 되는 셈이다. 여신이 직접 빚은 것 같은 연못에서, 진흙을 씻어내고 다시 태어나는 새하얗고 아름다운 여자아이를 말이다.
현진이가 연못에서 선연이의 몸을 씻어주는 내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다 맴돌았다. 도덕심은 절대로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고 호기심은 이런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귓가에 속삭였다. 배려심은 돌아보는 순간 선연이의 마음에 남게 될 수치심의 상처를 걱정했고 남자아이로서의 본능은 사실 내 발걸음을 반쯤 돌려놓았었다.
실제로 그날 돌아보았었는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돌아보았더라도 아마 별다른 것을 보지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보기엔 연못의 안개꽃이 너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돌아볼까 말까 고민하던 그 두근거림은 평생을 가도 잊히지 않을 소중함이 되었다. 이 세상의 장소가 아닌 것만 같은 아름다운 연못가에서 구름처럼 새하얗게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씻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아마 그녀를 훔쳐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전래동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선녀를 훔쳐보는 나무꾼도, 나르키소스를 바라보던 숲 속의 아르테미스도 그 순간의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수천 년처럼 길었던 그 망설임과 설렘의 순간은 영혼에 새겨졌다. 수년이 지난 뒤에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항상 되살아날 수 있게끔 말이다.
연못에서 마을까지 걸어 나오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현진이는 아직까지도 연못을 뒤지고 있는 후발대 아이들을 부르러 갔고 나는 선연이와 함께 벤치에 앉아 부끄러운 시간을 보냈다. 연못에서의 사건 때문에 어린 우리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손에서 꼼지락대던 하얀 머리띠를 돌려주며 조심스럽게 선연이에게 물어보았다.
“좀 괜찮아?”
선연이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머리띠 찾아줘서 고마워. 연못까지 데려다준 것도 고맙고.”
“안 다쳐서 다행이야.”
머리를 긁적거리는 내게 선연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 돌아보려다가 떨어졌어.”
“진짜?”
“응. 너 미끄러지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다가 손을 놓쳤거든.”
나는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긁적거렸다. 어린 나로선 선연이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고, 공연히 아련한 손끝만 꼭 움켜쥐었을 뿐이다. 그러자 선연이는 갑자기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 덜 자란 솜털에 입김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선연이는 토끼마냥 놀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연못에서의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야.”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알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와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는데 진지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래도 그 날 우리는 조금은 친해진 것 같았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그 순간에 내 마음에 담긴 감정이 수년이고 뿌리내리고 자라서 꽃을 피웠다.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 일 것이다. 함께 만든 그 비밀은 다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함이 되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방학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자랑해버리고 말았다.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나만의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가졌노라고 말이다. 어리고 못된 나는 그렇게라도 영웅에 가까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어설프게라도 선연이를 나만의 기억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아이는 내 행동을 그렇게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학교 남자아이들한테 소문이 퍼졌다는 것을 듣고 찾아온 선연이는 눈을 번뜩이며 팔뚝에 불꽃같이 새빨간 손톱자국을 선명하게 새겨놓았다. 그 징벌의 징표는 선연이와 내가 다시금 서로 신뢰할 일 구석이 없는 초등학생 소년과 소녀의 관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