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 : 가을별의 아이
Chapter 8 : 가을별의 아이
찰리는 기차역에 섰다. 그곳에는 바다로 떠나는 기차가 4시간마다 있었다. 더 늦지도, 더 빠르지도 않게 늘 4시간마다 해가 뜨는 동해안으로 떠난다. 그 일관성은 찰리를 약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찰리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기 전, 마지막 여행을 하고 싶었다.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다 내려놓고 떠나기 위해선 미련이 남지 않아야 할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떠난 것도 컸다. 그리고 하루 첫 해가 뜨는 바다라면 삶의 마지막 의미들을 돌아보기 위해선 괜찮은 장소 같았다.
찰리는 기차역에 걸려있는 거대한 시계를 보았다. 이제 기차가 도착하기까지 10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모든 것은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지는 법이다. 찰리는 기차가 떠나는 것도, 삶을 떠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방 하나 짊어지고 플랫폼에 서자 지나간 날들의 기억이 그를 빼곡히 채웠다. 긴 시간 동안 삶의 무게를 어려워했던 찰리로서는 생소한 장소였다. 기차에 탔던 적은 있었지만, 홀로 멀리 떠나가는 여행을 시작했던 적은 없었다. 새로운 시도는 약간의 설렘을 찰리의 마음에 심어놓았다.
뻗어나가는 기찻길은 일상 너머의 장소들로 그를 데려가 줄 것이 분명했다. 철로(鐵路). 철로 만들어진 길. 달궈진 바퀴가 그 위를 때리고 또 때려도 철로 된 길은 사람을 약속된 자리로 인도해준다. 찰리는 삶을 두드리는 망치와 모루의 마지막 열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 열기로 여정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떠나간다. 길었던 세월, 그토록 바랐던 떠나감이 이제사야 도래한다. 찰리는 비로소 거리감이 그리움을 만들고 그리움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일상적인 것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그리움 속에서 특별해지고 있었다. 아직 다 떠난 것도 아닌데 조금 거리를 만들려고 하자 모든 것이 다 그리워지고 있었다. 생소해지고, 아려왔다. 찰리는 그 느낌이 좋아서 한숨을 푹 쉬며 기차를 기다렸다.
찰리는 기차에 올라타며 일단 사후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떠나버린다는 그 감정의 문을 열면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모른다. 아직은 그 문을 열고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별도 딱지를 뜯어내듯이 한 번에 확 겪어버리는 것이 낫다고들 얘기하기는 했다. 그들의 논리인즉슨, 이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미련을 갖게 되고,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간만큼의 미적거림은 그만큼 더딘 치유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았다. 확실히, 다 뜯어져 버려야 다시 치유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사실이기는 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확실히 확실한 걸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찰리는 영 그렇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게 강하게 떠날 수는 없었다.
란은 궁궐을 나온 직후 한여름 여사가 예언했던 것처럼 다시 전원이 들어왔다. 란은 전원이 켜지자 깜빡거리며 감정계의 문이 열렸냐고 찰리에게 물어보았다. 찰리는 '살의'가 탈출한 것과, 어떻게 닫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감정문이 닫혔다고 말했다. 란은 기억을 잃은 상황과 한여름 여사가 해준 얘기들에 대해서 면밀히 묻더니 찰리에게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다고 얘기했다. 란은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선택을 도와줄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던 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고작 일주일 남짓일 거라고 역시 알려주었다. 살의가 세상에 나타난 이상 결과는 어떻게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파멸 앞에서 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었다. 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죽던 죽지 않던 마음을 다잡는 것뿐이었고, 결국 그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삶은 뭘까. 찰리는 한순간도 삶이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지독한 아픔이 존재한다. 유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이들을 언젠가는 잃고,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미움과 배신, 증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삶 예찬론자들을 찰리는 쉽게 이해할 수도 없었고 동의할 수도 없었다. 사랑은 감정이다. 그리고 모든 감정이 그렇듯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사랑이 기간 제한적이지 않다는 말도 된다. 단 한순간을 사랑하는 것과 영원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삶을 찬미하며 살아갈 이유는 없었다. 찰리는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자신의 선택지를 확고히 정했던 셈이다.
물론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되지는 않았다. 다시 탑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려고 마음먹었건만, 찰리는 한꺼번에 몰아쳐오는 감정을 의연하게 감당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전부터 그랬던 일이다. 한꺼번에 몰아치는 감정들은 자신의 것이던 타인의 것이던 찰리를 혼란스럽고 괴롭게 만들었다. 분명하고 뚜렷할수록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도 갑작스러운 선택은 갑작스러운 감정들을 만들어내었다. 미련, 그리움, 아쉬움, 두려움,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뭉텅이가 되어 찰리의 안에서 뜯겨 나왔다. 그것은 찰리가 다시 삼켜야 하는 감정이기도 했지만, 너무 두터워 꾹꾹 씹어 넘기지 못할 감정이기도 했다.
찰리는 그리움 속에서 그가 좋아했던 감정들을 떠올렸다. 그는 강렬하고 두꺼운 감정들보다는 조금 미적거리고, 조금 어설프고, 조금 엉거주춤한 감정들이 더 좋았다.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모르는 감정들. 아직 설렐지 설레지 않을지 결정하지 못한 순간들. 널 떠나보냈는지, 떠나보내지 못한 채 마음에 이고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 순간들이 더 행복했다. 칼로 딱 자르듯 정확한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일,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매력 같은 건 너무 뻔하다. 그보단 나 혼자 두근대고 갈팡질팡하며, 나 혼자만 마음에 담아두는 아찔하고 비밀스러운 매력이 좋다. 두려워서 좋아하지도 못하고, 상처 받지도 못하는 어설픈 상태가, 왜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더 황홀하다. 찰리는 죽음도 그처럼 모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찰리는 기차를 타며 다시금 그 순간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 떠나고 싶은지 떠나지 않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한 채 흔들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않은 채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는 4시간을 달려서 바닷가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찰리는 그 시간 동안 기차에서 책을 읽기로 결정했다. 그는 욕심내어 가방 가득 채워온 책들 중 한 권을 꺼내 들고 손길 가는 페이지를 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도, 아파서 온통 막막할 때도 그저 책을 피는 것이 답이다. 검은색 글자와 하얀색 여백으로 이루어진 환상적인 세계 속에서 우울과 두려움은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흑백인 주제에, 그 글자들은 세상에 색채를 넣었다. 탐욕스레 글자를 삼키며, 찰리의 감정도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고작 1시간 읽었을까, 찰리는 깜빡 잠들어버렸다. 주머니에서는 란이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고, 출발한 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찰리의 자리에 커튼을 쳐주었고, 객실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찰리는 그 사람에게 커튼을 쳐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 꾸벅 인사하다 보니 무릎 위의 책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찰리는 굳이 줍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에 남겨두면 누군가는 주워서 읽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의미의 조각들을 남기는 짓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심심한 기차 여행객들에게 좋은 책 한 권은 의미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인생수업이라는 참 좋아했던 책 제목이 그 순간에는 마음이 시리도록 박혀오고 있었다. 그때 찰리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무언가 읊조렸다. 그리고 그것은 찰리도 잘 알고 있는 구절이었다.
"때론 부조리하고, 하찮고, 무의미한 것 투성이인 이 삶에서 추구할 것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즐겁지 않은데도 웃고, 본질에 가닿지 않으면서도 화를 내고, 황홀하지 않은데도 새벽을 맞이한다. 가슴이 맞닿지 않는데도 관계를 맺고, 절망적이지만 밥을 먹는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 구절은 찰리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이자, 이 책과 함께 선물 받은 구절이기도 했다. 저 구절을 선물했던 아이는 찰리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를 절망 속에 몰아넣었었다. 찰리는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찰리를 눈 앞에 두고 그는 계속 말했다.
".......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너만의 별을 찾았니 아이야."
찰리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앉아있던 것은 사람으로 착각하기 쉬웠지만 그림자인간이었다. 세월을 초월한 감정이 흐릿한 실루엣 안에서 넘치듯 빛나고 있었다. 찰리는 그 감정들이 익숙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매일 마주치고 지나치는 그림자인간들과는 다른, 분명한 선과 뚜렷한 감정을 지닌 존재. 그가 마당에서 운명적으로 마주쳤던 최초의 그림자인간, 대감정이기도 했다. 찰리는 직감적으로 란이 말했던 조력자가 이 그림자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애도라고 스스로를 지칭했던 그 그림자인간은 찰리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너는 선택의 여행을 출발했지. 이제 네가 왜 이곳에 있는지, 왜 이런 삶을 살았는지도 이해했을 것 같구나. 너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결정했니.”
찰리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라지고 싶어요. 그건 오랜 바람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왠지 그냥 그래서는 안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왜일까요.”
“모든 삶에는 이유가 있지. 너의 삶도 마찬가지란다. 그저 죽고 사라지고 제멋대로 끝내서야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아. 너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지.”
“왜죠.”
“너도, 감정탑 안의 너의 조각도 바라는 것은 죽음을 통한 합치란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멋대로 사라져 버리면 안식은 찾아오지 않아. 그리고 감정탑에 쌓인 감정들은 폭주하며 대폭발을 일으키겠지.”
“그렇다면 제멋대로 죽어서도 안 된다는 거군요.”
“그래. 심지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서도 안 되지. 너는 그 탑의 꼭대기에서 다시 너 자신을 마주하여 하나 된 상태로 감정의 자유를 찾아야 한단다.”
“그렇다면 죽기로 선택한다면 이 여행은 제가 죽기 전 느끼는 마지막 자유인가요.”
“그래. 그래서 나는 너에게 선택의 결과들을 알려주려고 왔단다. 너는 삶도 죽음도 다 선택할 수 있단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저마다 다를 테지.”
찰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요?”
애도는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찰리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세상이 수축하는 것을 느끼며 과거의 기억 속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것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찰리는 고등학교 시절을 되새겼다. 그때는 인생수업이라는 바로 그 책을 수백 번도 넘게 일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지 잘 살 수 있을지, 잘 떠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때 당장 죽고만 싶을 정도로 괴로웠었다는 것을 찰리는 기억 속에서 새삼 실감했다. 때론 감정이 극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이 피부에 느껴지는 통각(痛覺)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것은 천근 물속에서 압력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세포 하나하나가 잘게 찢어지는 것 같기도 한 통증이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프다고 설명도 못하겠는 그 통증을 겪다 보면 아,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겠구나 싶어 지는 것이다. 찰리는 자신의 통증 속에서 아파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그 아픔이 자기 혼자만의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더욱 아파해야만 했었다.
당시의 찰리는 가까운 이들과 다짐을 했었다. 번데기 속의 나비처럼, 조금만 인고하며 기다리자고. 다 죽은 듯 숨만 쉬다가, 때가 되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순간을 기다리자고 말이다. 절망과 우울은 죽음의 삼베수의로 그들을 코쿤(Cocoon) 안에 감싸 안았지만, 그때의 아이들은 나비처럼 화려하게 관을 뚫고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해나가며 희망을 만들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들 그렇게 아팠으니까, 다들 함께 날아오르고만 싶었다.
찰리는 그 기억을 끝을 돌아보았다. 그 끝에도 바다가 있었다. 아이들은 떠났다. 결국 버티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청소년 자살률이 높은 나라였다. 어쩌면 단순히 찰리의 곁이어서 그랬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이 삶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찰리는 눈에 깜빡이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고통스러워했던 것도, 삶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도 자기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영원한 망망대해가 놓여있었고, 그보다 먼저 수많은 친구들이 그 물길을 건넜었다. 찰리는 그것도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적막의 바다에 잠겨 들어 다시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아도, 그것이 덜 괴롭고 덜 외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찰리는 눈을 감고 지나간 이들의 선택을 긍정했다.
찰리는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는 어느새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4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기차는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마치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찰리는 천천히 기차 밖으로 걸어 나갔다.
찰리 고등학교 때에도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주변 사람들을 다 잘라내면 모두가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결국 그가 돌아와야 했던 곳은 바다다. 아무도 없는 채로, 모든 이들의 끝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찰리는 왠지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비가 되고 싶었던 모든 이들은 바다를 건넌다. 정말로 나비가 되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찰리는 방파제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느리게 흔들었다. 주머니에서는 전화인지 란인지 모를 기기가 우웅 우웅 울려대고 있었다. 찰리는 조금 외롭다고 생각하며 애써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 앞으로 긴 시간 견뎌야 할 외로움인 것이 분명한데도 지금은 사무치게 외롭다. 전화받으면 무언가 달라질까. 길게 떠나가는데 조금 마음이 편해질까.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해는 느릿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바닷바람을 휑하니 머리카락을 헤집어놓는다. 발 닿지 않는 허공에 다리를 덜렁대는 느낌이 좋아서 찰리는 그렇게 한참 앉아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햇살이라니. 괜히 감상적이 되어버린 걸까. 힘겨울 만큼 눈부셔서 마음이 아린다. 아, 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그냥 마음 편해지고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마음이 아파온다. 찰리는 쭉 그를 쫓아오고 있던 애도에게 말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사람들을 잘라 내다보면 잘 떠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애도는 지는 해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도 곁에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 좀 쉬울 줄 알았죠. 어쩌면 그게 조금 덜 외로웠는지도 몰라요. 그땐 사람들 곁에 있는 게 너무나 아팠었죠.”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삶을 어떻게 해야 아파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몰랐을 게다 꼬마야.”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도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군요.”
찰리는 영원히 파도치는 바다에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요. 어디까지 살았어야 잘 살았던 걸까요. 삶의 의미는 언제 생겼다가, 언제 사라지죠.”
애도는 밤바다와 같은 고요함으로 대답해주었다.
“삶의 의미는 그 길이가 아닌 깊이로 결정된다. 한순간이라도 타인의 마음에 닿았다면 별처럼 길게 빛나던 벼락처럼 순간을 빛나던 너는 빛이겠지.”
찰리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별이라니, 마음에 드네요. 오랜 시간 빛나는 별이라. 그런 의미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여전히 오해하는구나. 긴 시간을 살아가는 선택을 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너는 지금도 영생을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단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삶은 아니지.”
애도는 감정으로 넘실거리는 손을 들어 바다를 가리켜 보였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다시 환상과도 같은 기억이 펼쳐졌다. 찰리는 그것이 오래된 기억이자 아직 겪지 않은 미래에 대한 환영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찰리는 미래의 도시에 섰다. 큰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에 사뭇 다른 색채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표정에 공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걸었다. 큰 위기라도 닥쳐서 피난을 가는 것 같은 모습에 찰리는 의아함을 느꼈다.
애도는 찰리의 곁에 선 채로 중얼거렸다.
“저들은 도망치는 거란다. 감정으로부터, 영원한 삶으로부터 말이다.”
찰리는 먼 곳에서 아른거리는 감정탑을 바라보았다. 감정탑의 최상층부는 이미 폭발해버린지라 잔해가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 강렬한 감정 에너지의 파장이 수 km는 떨어져 있는 곳에서조차도 느껴질 정도였다. 셀 수없이 많은 마귀들이 그 공간의 틈새에서 계속해서 스미어 나왔고, 찰리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감정의 날개를 두른 채, 악마들이 천상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찰리는 애도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미래인가요.”
“아니.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 중 한 갈랫길일 뿐이다. 이 미래에서의 너는 감정탑 꼭대기에서 잃어버린 조각을 찾았지만,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지. 그리고 10년 뒤, 감정탑은 결국 폭주했단다.”
“제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미래라고요?”
“그래. 여기서 너의 삶은 꽤 길었단다. 하지만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찰리는 고개를 들어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해 있었다.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와 집을 잃은 가장이 거리를 수놓고, 연인과 연락이 되지 않는 청년과 친구가 죽은 학생의 통탄이 대기에 울려 퍼졌다. 찰리는 이 고통스러운 감정의 폭풍에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감정은 흐름이 되어 찰리에게 천천히 스미어 들어왔다. 그 순간 찰리는 수천 명의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슬픔으로 인간이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찰리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제가 제때에 죽지 않는 것이 이토록 가혹하단 말인가요? 제가 이 모든 사람의 고통의 원인이란 말인가요!”
애도는 담담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건 아니다. 이건 저들의 슬픔일 뿐이지.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은 타인의 슬픔이 아니다. 너 자신의 슬픔이라면 모를까.”
애도는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찰리는 짓누르는 공포와 마음을 갉아먹는 슬픔에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지만 애써 그 검은 발걸음을 뒤쫓았다. 멀리 감정탑에선 하늘을 다 뒤덮을 것 같이 거대한 날개를 지닌 까마귀가 태양을 삼키고 있었다. 빛나는 감정들이 모여들어 까마귀의 어두운 창자 속으로 사라져 갔다. 찰리는 슬픔과 고통, 살의와 기쁨이 모두 뒤엉켜 까마귀를 배 불리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과 다행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애도는 군중들이 모여 있는 광장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불타는 듯한 백금발의 여성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태어난 지 채 몇 개월 되지 않았을 그 아이는 영롱한 기운을 두른 채로 세상을 두 손 사이로 주무르고 있었다. 찰리는 그 기운이 자신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자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그 서기 어린 기운은 인간 감정의 집약체였다. 놀라운 슬픔과 영롱한 기쁨, 깊은 우울과 드높은 희망이 그 오색의 빛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찰리는 저런 감정과 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모습에 다시 한번 더 충격을 받았다.
“은하 누나..”
은하 누나는 찰리의 기억보다 십수 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안 그래도 밝았던 머리카락은 타는 듯한 백금발이 되어있었고, 약간은 통통했던 얼굴에는 세월이 메마름을 새겨놓았지만, 은하 누나는 찰리의 시간대보다 성숙하고 현명하며 당당한 여성이 되어있었다. 찰리는 다른 시간대에 속해있는 은하 누나의 모습을 보며 말 못 할 서글픔을 느꼈다. 어쩌면 저것은 그가 마주치지 못할 시간대의 은하 누나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왕처럼 빛나는 것은 같았지만, 저토록 깊은 눈빛을 보내는 은하 누나를 만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은하 누나는 피난하는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은하 누나 본연의 차분한 기운도 사람들을 잘 이끌었지만, 품에 안은 아이의 서기 어린 감정은 피곤하고 긴장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화롭게 잘 이끌어주었다. 찰리는 별처럼 빛나는 아이와 그 아이를 품고 사람들을 다독이는 은하 누나를 보며 이 미래의 일들이 조금 궁금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서서히 질서를 찾고 삼삼오오 줄을 지어 공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감정탑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두 발걸음뿐이었다. 은하 누나는 품 안에서 까르륵 웃는 아기를 어화둥둥 흔들며 혼잣말을 했다.
“찰리 얘는 이 꼬맹이만 남겨두고 대체 어디로 갔대...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
찰리는 경악 속에서 은하 누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이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에 대번에 혼란스러워졌다. 미래의 자신은 은하 누나와 결혼한 거라고 생각하니 영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은하 누나는 찰리와 애도가 보이지 않는지 아이만 바라보며 까꿍!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너네 엄마랑 아빠랑 둘 다 이상한 사람이 다야. 사람들 다 도망가는데 널 버려두고 어디로 사라졌다니. 내가 너희 엄마로 보이니! 웃지 마 정들잖아. 까꿍! 아구구 이 쪼꼬만 앞니 봐라!”
찰리는 약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먼 미래의 자신은 아이를 은하 누나에게 맡기고 어디로 떠났던 것 같았다. 하긴, 세상사 아무리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고 해도 은하 누나와 자신이 결혼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에 비해서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라, 결국에 자신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은하 누나에게 아이를 맡겨놓았던 셈이다. 찰리는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애도는 은하 누나의 품에 안겨서 별처럼 빛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 안에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겨있었지만 찰리로서는 인간이 아닌 것의 감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애도는 천천히 말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저것은 너의 아이다. 살아남은 선택의 결과지.”
찰리는 침묵 속에서 자신이 어쩌면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빛은 너무나 영롱한 것이라 제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세상에서 앗아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미련을 남기지 않으며 살아왔건만 그 순간 찰리의 마음에는 약간의 간절한 미련이 남았다. 저 아이를 보고 싶다. 저렇게 빛나는 아이라면 분명 진솔한 감정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 미래라면 찰리는 한 번쯤 닿아보고 싶었다. 애도는 찰리의 미련을 눈치채고 말했다.
“그리고 저 아이의 미래는 너도 보다시피 불투명하지. 엄마와 아빠는 사라졌고, 그들이 아이를 위탁한 여성은 분명 강인하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자기 자신조차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아직 대혼란의 시기를 겪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별이 너무 일찍 도래한 셈이지.”
“별이요?”
“그래. 인간의 감정을 머나먼 이상으로 이끌어주는 무구한 힘이 바로 별이다. 저 아이는 모든 감정을 다 품어낼 수 있는 최후의 별이지. 하지만 인간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구나.”
애도의 말과 함께 감정탑은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도시 건너편에서조차 그 광포한 진동이 살결에 느껴질 정도였다. 탑에서 뿜어져 나온 감정 에너지는 노을처럼 붉게 흔들리며 대기를 찢어놓기 시작했다. 지상에 도래한 마귀들이 미쳐 날뛰는 것을 찰리는 그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
도시 저편에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총성과 아우성과 단말마의 감정이 옅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찰리는 광포한 태양 너머로 거대한 검은 날개가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찰리는 아득한 절망을 느끼며 다시 환상에서 깨어났다.
멀리서, 마지막 석양이 희미하게 반짝거린다. 딸깍이고 바스러지며 하루의 마지막 광선들이 아련히 영혼에 박혀 든다. 해는 서산 너머로 넘어가지만 그 여운은 바다에 흩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찰리는 그 마지막 빛이 별빛 같다고 느꼈다.
찰리는 애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다와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의 선택이 세계의 종말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 치고 찰리는 평온했지만, 되려 애도는 격앙되어 보였다. 왜인지 알 수 없어서 찰리는 질문을 했다.
“저 미래는 고정된 건가요.”
“그 어떤 시간도 고정되어 있지는 않지. 바꾸고자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왠지 바꾸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세상 정말 중요한 일들은 원인에도 결과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소중한 것은 원래 잃어버릴 수 없는 법이다. 잃어버렸다면 소중하지 않았던 셈이지.”
“삶은요? 삶은 소중하지 않은가요?”
“잃어버릴 수 있는 삶이라면 소중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삶의 부분들은 잃어버려지지 않지. 네가 잃는다 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이, 결국 세상이 간직한단다.”
찰리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겐 잃어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 없군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심지어 갖지 못할 아이를 보았는데도 크게 아쉽지는 않아요. 미련이 없다는 것은 소중한 것도 없다는 것 아닐까요.”
애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어리고 미성숙해서 겁에 질려 소중한 것을 직시조차 못하고 있을 뿐이지. ‘다 별거 아니야!’라고 애써 되뇌며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것뿐이다.”
찰리는 발끈하며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단정하죠? 나는 방금 전 그 풍경에도 대단한 것이 느껴지지 않아요.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이따위로 인생이 흘러가야 하는지 답답할 뿐이라고요. 사라져도 아무 상관없을 정도로요.”
애도는 찰리가 미처 몰랐던 얘기를 건네어 주었다.
“너는 비밀의 정원에서 있었던 마지막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할 테지.”
찰리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에 애도의 이야기는 이어져갔다.
“그 안에서 너는 맹렬한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고, 나는 손쉽게 너의 마음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네 안에 있던 감정에너지를 다루는 재능을 잠시 빌려 살의를 퇴치했지.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네가 겁에 질려 삶을 미치도록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런 갈망이라면 언제든지 마귀에 사로잡힐 수 있지. 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한 선택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런 식의 삶도 그런 식의 죽음도 긍정되지 않아.”
대답할 수 없었던 찰리의 주변을 지키던 애도는 다시 한 마디를 더 꺼냈다.
“방금 환상은 어땠지? 은하 누나는? 너는 다시 그녀에게 몹쓸 죄책감과 책임감만을 남겨놓고 떠나도 좋다는 건가? 그것이 네가 바라는 죽음인가?”
찰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곤 확신했다.
“책임감과 죄책감을 남겨두고 떠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전화 한 통이면 되죠. 자기세뇌 같은 건 필요 없다고요.”
찰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찍힌 부재중 통화를 확인했다. 은하 누나의 이름은 화면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은하 누나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던 만큼 거의 20년에 가까운 인연인 셈이다. 그 발랄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이 순간 새삼 그리워진 찰리는 저도 모르게 통화를 눌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유쾌하고 즐거운 은하 누나의 목소리에 찔끔 고마워지고, 서글퍼지고, 행복해지고 말았다.
“차알리이!”
“안녕 누나.”
“전화는 왜 안 받아! 아니 그것보다, 네가 부재중 통화에 화답하다니! 처음 있는 일인걸!”
“잘 있었어 누나?”
“그으러엄. 너 어째 여자 친구 생긴 뒤로 연락이 없다? 그러면 못써어어.”
“여자 친구 아니야 누나. 누나가 바빠서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지 뭐. 요새 바쁘잖아.”
“그렇지! 나는 인기가 많고 바쁘다고 찰리. 하지만 널 위해서라면 시간을 내주지. 언제 볼래!”
찰리는 은하 누나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아려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할 수 있을지도 지금의 찰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눈 앞에는 자꾸만 자신의 아이를 꼬옥 안아주던 은하 누나의 환영만이 떠올랐다. 찰리는 왠지 은하 누나에게 다 말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괜히 눈물이 글썽거리고 말았다.
“당분간은 조금 바쁠 것 같아. 누나도 바쁘게 잘 지내고 있어.”
“그으래에?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한 모양이네. 조만간 만나서 재미있는 얘기 다 들려줘! 여자 친구도 소개시켜주고.”
“여자 친구 아니래도. 천천히 소개시켜줄게. 언젠가 만나겠지.”
“그으래 찰리. 그렇게 꽁꽁 감춰놓는 거 아니야. 그러다 덜컥 속도위반해서 나보다 먼저 결혼해버리면 가만 안 둔다! 그렇게 낳은 아이는 절대 안 예뻐해 줄거라고!”
그 순간 찰리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미래의 환영에서의 그 아이는 자신과 누구의 아이였던 것일까? 찰리 혼자서 자가수정을 했을 리는 없으니 분명 그 아이에게도 어머니가 있을 터였다. 찰리는 일단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누나 끊어야겠어.”
“응? 삐졌어 찰리? 너무 농담이 심했니 내가?”
“아니야. 중요한 게 떠올랐어 지금.”
“응? 결혼 얘기 나와서? 진짜 사고 친 거야?”
“아냐 끊어!”
찰리는 전화를 끊고 애도를 쳐다보았다. 애도는 퍽이나 흥미로운 광경을 봤다는 감정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길었던 인연의 마무리치곤 대단하군. ‘아냐 끊어!’라니. 죄책감 대신 분노를 느낄 수 있겠어 은하는.”
“명..아 인가요..?”
“아니. 은하다 네가 통화한 건.”
“아니! 그 환영에서 아이의 엄마!”
애도는 대답하지 않았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찰리에게 아직도 소중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찰리는 정돈되지 않는 감정에 혼란에 빠졌다.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다 너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10년 후의 네가 어떤 선택들을 할지 지금의 너로선 이해하기 어렵겠지. 그리고 10년 뒤의 너도 지금의 널 다 이해하진 못 할 거다. 감정이란 그런 것이지.”
찰리는 그제서야 기억에서 지워놓고 있던 명아를 떠올렸다. 그리곤 그 감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짙은 것이라 스스로 억압해놓았을 뿐임을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그는 명아를 보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 생각을 다시 떠올리는 건 너무나 비참한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찰리가 비극적 감정의 굴레에 빠져들기 직전, 애도가 감정을 자르고 들어왔다.
“명아에 대한 사랑이나 집착은 네 삶의 의미가 아니야.”
“그럼 뭐죠? 그 빌어먹을 탑에 가서 죽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다. 네가 방금 둘러본 미래는 네가 탑에 가서 죽는 대신 명아와 행복해지길 선택해서 생긴 결과였지. 누구나 죽는다. 사랑을 하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를 만들건, 혹은 혼자 외로이 살아남건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그것 역시 삶의 의미는 아닌 거야.”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대체 뭐죠. 뭘 위해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 건가요.”
애도는 다시 한번 수평선 위의 먹구름들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잠잠해지는 광선들 사이로 또 다른 찰리의 선택이 펼쳐지고 있었다.
찰리는 다시 대전쟁의 시대로 돌아왔다. 인간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기괴한 감정들이 마귀가 되어 인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찰리는 그가 평생을 느꼈던 감정들이 실체화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죽고 싶다는 의지, 고통을 벗어나 사라지고 싶은 갈망, 삶에 대한 공허가 모두 끔찍한 괴물이 되어 인간을 학살했다. 그 누구도 죽지 않았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어 기억도 존재도 없는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갔다. 찰리는 자기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을 잃는 인간들을 보며 저것이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죽음이라고 느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찰리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힐 수밖에 없었다.
찰리의 눈앞에서 어떤 여성은 벌겋게 빛나는 질투와 검게 빛나는 착각에게 잡아먹혔다. 질투와 착각에 휩싸인 여성은 반으로 갈라져 꿈틀대다가 숨을 멎었다. 곧 감정에 휩싸여 마에 휘둘리게 된 그녀의 육체는 반 토막 난 신체를 열심히 움직여 다음 희생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 여성의 심장은 여전히 거세게 뛰고 있었고, 머릿속은 생전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보호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찰리는 그것이 삶이 아님을 알아서 구역질을 하고 또 했다.
애도는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찰리가 탑으로 되돌아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이것은 그들에게 닥쳐올 유일한 미래였다. 감정과 인간의 영원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상실을 느끼는 것은 인간 쪽일 수밖에 없었다.
찰리는 그 사실을 거부하며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계를 뛰고 또 뛰었다. 세상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불안에 떨었고, 세계의 수많은 감정탑들은 마굴이 되어 끊임없이 마귀들을 쏟아냈다. 찰리는 자신의 삶을 가지고 이토록 가혹한 선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죽건 저렇게 죽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애도는 미끄러지듯 찰리의 곁을 날며 끊임없이 세뇌했다. 자기 자신과의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반드시 탑으로 돌아가서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고 말이다.
모든 것이 그저 미래에 대한 환영임을 알면서도 찰리는 더 견디지 못하고 검게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찰리는 오랫동안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으로 눈꺼풀을 떴다. 현실로 돌아올 줄 알았건만, 여전히 생경한 기억과 기분이 그의 혈관 속에 남아있었다. 찰리는 어찌 된 영문인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환상 내내 그의 곁에 딱 붙어있던 애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에 생겨난 새로운 세상을 가만히 느꼈다. 마치 오래된 기억 같은 빛바랜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찰리의 눈앞에는 끝없는 평원과 오래된 감정탑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감정탑은 여지껏 찰리가 본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오래되어 보였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층에서는 무한에 가까운 감정에너지가 새로운 세계마냥 뻗어나가고 있었고, 탑은 대지에 뿌리내린 나무마냥 천천히 꿈틀대며 하늘을 찌르듯 자라나고 있었다. 찰리는 그것이 최초의 감정탑이자 세계 모든 감정의 중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찰리는 홀로 평원을 걸어 감정탑 가까이까지 내려갔다. 감정탑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마치 결혼식장에서처럼 입구로 향하는 꽃길을 가운데 두고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찰리는 군중 중간중간에 그림자 인간들이 서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기계로 된 팔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림자인간들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눈이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키가 3m는 될 것 같은 괴수를 닮은 그림자인간도 서있었다. 그곳에 그들은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무언가를 기다렸다. 찰리는 슬프면서도 벅찬 감정을 느꼈다. 이 순간은 모두가 기다려온 화합의 순간이었다. 서로 대립하고 대척하던 인간과 세계, 감정과 본능이 마침내 손을 잡은 순간인 것이다.
모든 그림자인간과 사람들은 한 곳으로 고개를 돌려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꽃길을 따라서 한 명의 소녀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자그마한 감정들이 유성우처럼 맺혀있었고, 두 눈에서는 차분한 이성의 동그라미 안쪽으로 타는 듯한 광기가 불씨가 되어 빛났다. 소녀의 눈 안에서는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슴 언저리에는 별보다도 밝게 빛나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찰리는 그 목걸이를 알아보았다. 모든 감정이 모여들고 숨 쉬며 다시 자연스럽게 순환하고 있는 그 목걸이는 분명 란이었다. 그가 란을 다루며 느꼈던 감정 그대로가 그 목걸이를 이루는 작은 보석에 녹아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을 때와는 다른 강대한 순수함과 억겁의 세월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이 자신에게 길을 알려주었던 수다쟁이 감정 통역기이기도 했다.
꽃길을 걷는 소녀를 바라보던 군중 사이에서 거대한 그림자인간 하나가 크나큰 고함을 내질렀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찰리는 그것이 환희에 찬 탄성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 함성을 시작으로 모든 인간과 그림자인간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이 모두 다 녹아있었다. 소녀는 담담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 모두를 지나쳐 걸었다. 냉막한 표정이었지만, 찰리는 소녀의 눈길이 머무른 곳마다 불길과도 같은 뜨거운 감정이 고착되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불처럼, 터져나가는 별처럼 소녀는 최초의 감정탑의 문을 활짝 열었다.
감정탑 내부의 끝없는 계단 끝에는 황금빛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소녀는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마귀와 인간들은 한 마음으로 소녀의 비상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정확한 발걸음과 격정적으로 흩날리는 머릿결을 품은 채로 천상의 계단을 향한 영원의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끝에서 소녀는 목걸이를 떼어 냈다.
그 순간, 온 세계의 감정이 다 소용돌이쳤다. 찰리는 소녀의 몸 안에 깃든 것이 인간의 모든 부분과 감정의 모든 조각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녀는 그야말로 세계 그 자체였던 것이다. 봉인해 두었던 모든 감정을 해방한 그 순간의 소녀는 한없이 어린 꼬마였고, 끝없이 지혜로운 노파였으며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남성이자 티 없이 순수한 소년이었다. 모든 세계가 한 마음으로 소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소녀는 모든 감정을 그러모아 별처럼 빛나는 보석을 제단의 한가운데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세상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황금빛 광채가 감정탑에서 뿜어 나와 세계를 감싸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찰리는 마침내 인간이 세상과 화해를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인간은 감정을 받아들이고 세계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라보는 모든 존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별이 되어 맺혔다. 그 안에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세상을 용서하는 모든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찰리는 더 이상 죽음과 삶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의 세계를 통해서 세상은 마침내 완성되었던 것이다.
찰리는 버둥거리면서 깨어났다. 하마터면 방파제에서 떨어질 뻔한 몸짓이었다. 간신히 찰리를 고정시킨 애도는 무시무시한 안광을 빛내며 물어보았다.
“무엇을 보았지?”
“으어, 켁, 으아, 뭐라고요?”
“너는 내 기억의 세계에서 사라졌어. 하지만 너의 기억으로도 돌아오지 않았지. 분명 예지와 예언의 세계로 갔을 텐데 너는 무엇을 봤지?”
찰리는 아직까지도 눈에 선한 그 엄숙하고 놀라운 풍경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그 세계에는 희망이 있었다. 비록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났을지언정, 사람은 결국 감정, 그리고 세계와 하나 되는 방법을 알아내었던 것이다.
찰리는 황금빛 감정탑과 드넓은 평야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리고 그가 본 기적과도 같은 장면을 말했다. 찰리는 애도에게 다 말한 뒤 질문을 덧붙였다.
“그런 미래도 있는 거지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다 파멸만 있는 것은 아닌 건가 봐요? 그 소녀는 누구고 그 탑은 어디지요?”
애도는 대답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해가 바다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찰리는 긴 시간 동안 해가 사라지는 바다에 앉아 생각을 곱씹었다. 옆에서 윽박지르던 애도는 마지막 환영 이후로 아무 말도 없었다. 찰리는 바다를 따라 눈을 감으며 멀리 퍼지는 자신의 감정을 느꼈다.
찰리는 바다처럼 멀리 퍼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에 오줌 한 방울 떨어트려봐야 옅게 퍼지며 아무 의미도 아니게 된다. 찰리는 자신도 그렇게 옅게 퍼지면 아무 의미도 아니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고통도 사라질 것 같았다.
찰리는 명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니, 미래와 과거 그리고 현재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 시간대와도 접점을 만들면 고통이 거세어질 것 같았다. 찰리는 그저 내면의 고요와 고통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찰리가 밤하늘 아래에서 꿈틀대는 고래를 본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애도는 몇 시간 동안 열리지 않던 입을 열었다.
“네가 본 것은-.”
“내가 본 것은?”
“아주 오래된 신화이자 예언이다. 물론 너는 들어본 적이 없겠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감정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오래된 신화라니. 당연히 들어본 적 없겠지요.”
“그 신화에서는 아주 먼 미래에 별과 같은 아이가 도래한다.”
“그래요. 별 같기는 하더군요.”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 아이는 격정적이고 부정적이고 괴로운 붉은 감정과 냉정하고 긍정적이고 희망찬 푸른 감정 두 가지를 다 몸에 두를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아이란다.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몽상적이고 현실적인,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그 아이는 마침내 인간의 감정을 세계와 화해시키게 되지.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가을별의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그 자리에 찾아가 경배를 올린다. 분명 가을별의 아이들 중에서 별의 소녀가 태어날 테니 말이다.”
“가을별의 아이라고요?”
“그렇다.”
“왜 그런 이름이죠?”
“예언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는 않는구나. 가을별의 아이라는 건 아주 특별한 종류의 감정선을 타고난 아이들에게 붙여주는 이름이란다. 그러고 보면 아까 은하가 안고 있던 너의 아이도 가을별의 아이였던 것 같은데.”
찰리는 먼 미래의 신화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애도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마음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세상은 그와 상관없이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옳은 선택도 그른 선택도 없다고 생각하자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떠나면서 남겨질 미래는 절망만은 아니었고, 설령 절망이라고 한들 그가 혼자서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찰리는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탑 꼭대기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오래 잃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고, 온전한 채로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사랑을 하는 것도 삶을 사는 것도 다 자기 자신만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이었다. 타인의 무게를 내려놓은 지금 찰리의 영혼은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찰리는 붙들었던 삶도 갖고 싶었던 의미도 다 햇살과 함께 흘려보냈다.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조금 마음에서 빛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찰리는 어두워진 방파제를 두 팔 벌려 균형을 잡으면서 번쩍 일어섰다. 발아래 들썩이는 파도가 아찔했지만, 자신이 선택하기 전까지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 역시 알았다. 찰리는 가만히 서있는 애도를 불렀다.
“나는 떠날 준비가 되었어요.”
“그건 죽을 준비인가.”
“아뇨. 하지만 꼭대기까진 올라가 봐야죠. 그 뒤의 선택은 오롯하니 내 몫이에요. 누구도 강요할 수 없지요.”
애도는 의외로 순순히 동의했다.
“좋다. 그리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결단을 내린 셈이군. 어서 가도록 하자.”
그 순간, 찰리는 심장이 찌르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자.. 잠깐, 뭔가 이상해요.”
“뭐가 말이냐. 꾀병은 용납되지 않는다.”
“마음이... 감정이...”
찰리는 순간적으로 반경 몇 km 내에 있는 감정이 강렬하게 한 지점으로 흡착되었다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심장박동 같았다. 찰리는 감정이 모여드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비록 수도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하나의 완성된 감정탑이었다. 찰리는 다급하게 애도에게 물어보았다.
“저 감정탑... 저 감정탑도 압축 모듈 같은 게 설치되어있나요?”
“뭐라고? 응. 물론 그렇다. 아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감정탑에...무슨 일이...”
그 순간 찰리는 감정탑으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빨려 들어가더니 밝은 빛과 함께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 빛은 폭탄 수백 개가 터진 것이라도 되는 마냥 지축을 흔들며 모든 것을 쓰러트렸다. 수천 개의 파편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것을 느끼며 찰리는 정신을 잃었다.
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