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이 근본적인 질문은 전 직장을 그만두면서 잠잠해졌지만, 아일랜드에서 다시 취직을 하고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다시 그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직함으로 벌어먹고 산지 10년이 다 되어가면서도 나는 단 한순간도 스스로를 개발자라고 진정으로 생각적은 없었다. 언제나 이렇게 느슨한 마음이었다. 당장하고 있는 이 일은 들이는 노력에 비해서 벌이가 괜찮은 직업일 뿐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찾게 된다면 언제나 개발 일은 쉽게 내던질 것이다,라고. 인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된다면 그까짓 돈은 문제 되지 않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스스로를 개발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얘기하자면 취직보다 훨씬 이 전인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학부시절 전공한 컴퓨터 공학은 내가 원했던 학과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내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닌 질문이라 무척 힘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저만치 앞서 달릴 때, 나는 왜 그들과 같이 뛰어가야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부터 찾으려 했다. 공부를 못해서 힘든 게 아니라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게 너무도 힘들었다. 결국 어찌어찌 수능을 치르고 대학 원서 접수를 할 때가 되자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한 전문학교의 애니메이션과에 찾아가 면접을 보고 덜컥 합격을 한다.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 조금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교과서 귀퉁이는 항상 낙서로 가득했고 언젠가는 이 낙서를 제대로 된 작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이렇게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야 어머니께 애니메이션 전문학교로 진학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 후로는 너무도 뻔한 클리셰다. 당연히 반대에 부딪혔고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에게까지 연락을 취해 교무실로 불려 가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나는 이때 담임선생님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은 어른들의 말을 들은 것을 후회할지 몰라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고마워하게 될 것이라고. 지금 그 나중이 되어 결과만 얘기하자면 정확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내 의지를 꺾고 희망대학과 학과를 새로 적었는데 이때에는 심리학과와 철학과를 적었다.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 학과들이라면 적당히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작은 의지마저도 무참히 찢겼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종이가 눈앞에서 찢겨나갔다. 결국은 엄마가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받아온 지망서를 제출했다. 나를 모르는 남이 적어준 그 종이를 제출하고 나선 많이 울었다. 결국 세 개의 지원대학 중 두 개에 합격을 했고 그중 집에서 조금 더 가깝고 교통편이 그나마 나은 곳을 선택했다. 단지 그 이유였다.
남이 적어 준 지원서를 제출한 그 순간부터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실은 집안 형편도 몹시 어려워서 대학교 갈 형편도 되지 않았다. 나 또한 대학에 갈 필요성을 일절 느끼지 못했기에 진학은 생각도 없었는데 우연히 신청한 장학제도에 선발되어 등록금 전액을 내지 않고 장학금으로 다닐 수 있게 된 사정이었다. 이 장학제도에 선발되지 않았더라면 애당초 지원서를 제출할 고민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큰 행운이고 참 감사한 일이지만 그때에는 그저 나를 묶어둔 강력한 족쇄였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장학제도를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하는 게 맞는 것인지 매일 고민했다. 나로 인해 기회를 잃었을 다른 한 명 분의 인생에 너무도 큰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돈은 나보다 절실하고 나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일 텐데.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고 장학금을 가로챘다는 생각에 대학시절이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하지만 그 가시방석을 벗어나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아니, 이것은 변명이다. 나는 그저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는 겁쟁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찾고 원하는 삶을 살려는 노력을 해보지도 않은 채 툴툴거리기만 하는 내가 참 한심해 보였다. 이제는 일어설 때가 되었다. 주변이 절벽이어도 일단 떨어져 보는 것이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학업을 중단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숨김없이 털어놓았고 나의 중단선언이 당연히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 관리자님께서 진심으로 내 말을 듣고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네가 하고 있는 고민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조금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그 작은 위로에 단단했던 결심이 흐물흐물해져서 결국 나는 가시방석으로 돌아와 꾸역꾸역 학업을 마치게 된다. 이 때도 자랑스럽거나 뿌듯하기는커녕 내 뜻대로 살지 않았다는 괴로움과 장학재단에 대한 죄책감뿐이었다.
이런 삶은 무엇일까. 나는 언제나 내 몫의 음식을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냈다. 중고등학교의 그 깜깜한 터널도 간신히 지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졸업을 하고 나서도 상황은 변한 게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괴로운 시간을 어떻게 혼자서 겪어냈는지 과거의 내가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는 그 하루를 버티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오로지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졸업을 하긴 했지만 전공을 이어서 직업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의 내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의외로 일을 시작하니 재미는 있었다. 단골과 친분이 쌓이고, 쉬는 시간 동안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도 재밌고, 무엇보다 내 노동으로 만든 음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6개월쯤을 바쁘게 보내고 일에도 슬슬 적응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또 현자타임이 찾아온다. 내가 이렇게 피클셔틀을 하려고 힘들게 대학을 다닌 게 아닌데. 나 때문에 장학금의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인생이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적은 월급은 가장 큰 문제였다. 많게는 하루에 12시간도 일한 적이 있었지만 그래봤자 한 달에 60만 원 정도를 벌었다. 이때 시급이 4200원인가 4300원인가 그랬다. 이 돈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알바몬, 잡코리아에서 개발자로 검색을 해봤더니 가장 적은 월급이 150만 원이었다. 지금보다 최소 두 배가 넘는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대충 작성한 이력서를 작은 회사 몇 군데 넣었다. 그중 나에게 첫 번째로 연락을 준 회사에 가서 면접을 봤고 그렇게 개발자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된 것이다.
개발자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발자라는 직업은 내 적성에 참 잘도 맞았다. 적성에 맞으니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서도 10년 동안 커리어를 잘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뚜렷한 정체성이 없는 것은 장점이 되기도 했다. 고집하는 게 없으니 내가 맡은 업무는 언제나 유동적이었다. iOS개발을 하다가 Android를 하다가 또 필요하면 서버도 만지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런 부분은 한 번도 크게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툴툴거리며 다니긴 했지만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덕분에 기본기가 있었고, 또 보안동아리를 하며 이것저것 만져본 터라 낯선 것에 두려움 같은 것도 없었다. 하나만 파는 장인이 될 거라는 마인드도 없기 때문에 회사에서 이게 필요하다 그러면 한번 해 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쉽게 접근했다. 하지만 일을 대충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할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막상 하나에 꽂히면 깊게 파고드는 성격 또한 개발자라는 직업에 참 잘 맞았다. 문제가 생기면 끝까지 해결하려고 하는 성격 또한 개발자로서의 큰 자산이었다. 덕분에 이제는 어떤 일이든 주어지면 잘해 낼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럼에도 개발자라는 뚜렷한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뿌리 깊지 않은 나무처럼 항상 흔들리고, 언제든 뽑혀나갈 것 만 같은 불안감이 매 순간 나를 괴롭힌다. 여전히 포기했던 내 선택지에 미련이 남아있기에 내게 조언을 해 준 어른들에게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원망한다. 이 직군에 자질이 있다는 것 또한 나를 괴롭힌다. 누군가는 분명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개발자로 일을 한지 거의 10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도 스스로를 개발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 고민한다. 나는 여전히 기회가 될 때마다 다른 직업군을 기웃거린다. 노력을 하면 현재의 내 인생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정한 내 인생이 다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진정한 인생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간혹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사람이 항상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이제는 안다. 어떤 식으로든 언제나 세상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도. 내 의지를 꺾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좋은 날씨의 아름다운 아일랜드 하늘을 보며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이라는 단어가 계속 꼬리를 무는 것은 내가 걸어온 길을 아직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성일: 2020.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