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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오시 Dec 14. 2023

어머니

새벽에 깨었다. 한국은 한창 낮일 것이다. 습관적으로 카톡을 확인 인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엄마와 동생의 대화가 많이 쌓여있었다. 대부분 엄마가 보낸 메시지들이다. 엄마가 동생에게 무엇을 시켰는데 동생은 그게 하기 싫은 눈치였다. 대꾸도 잘하지 않아서 무엇을 왜 싫어하는지 정확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감이 왔다. 평생을 지겹도록 겪은 뻔한 레퍼토리였기에. 나라면 결국 엄마와 다퉜을 것이다. 왜 해야만 하는 일인지 설명을 요구하고 하기 싫은 이유를 주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은 그런 귀찮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화는 마무리도 없이 엄마의 넋두리 같은 문장에서 멈춰있었다. 싫었다. 그 새벽에 앉아 이렇게 싫은 마음이 어디에서 샘솟는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엄마가 동생에게 부탁한 것, 그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남이 봤더라면 모두가 엄마 편을 들었을 것이다. 불효자식이 되는 것은 너무도 쉽다.





요즘 세상이 너무 혼란하다.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1, 2년 새 부쩍 안 좋은 뉴스를 많이 접했다. 인류 멸망이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 보려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님의 어린양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고 그냥 한 번쯤은 읽어 보고 싶긴 했다. 어쨌든 전 세계 베스트셀러니까. 이 전에도 몇 번 읽어보려 했는데 워낙 가독성 떨어지는 문체에 적응이 안 돼서 포기하기를 몇 번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을 하니 나처럼 성경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읽기 쉽도록 번역된 성경을 찾았다. 문체만 바뀐 것인데도 훨씬 잘 읽힌다. 창세기부터 시작했는데 어느 막장 드라마에도 뒤지지 않는 스토리라서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동생의 카톡 메시지를 보니 성경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해 보려고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이에 아브라함은 정말로 자식을 죽이려고 했다. 그것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인 한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린다. 천지를 창조한 신이 고작 한 인간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 살인, 그것도 자식을 살해하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일단 깊게 생각하지 말자. 대신 나는 인간으로서 신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아브라함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다. 신의 명령이라 한 들 외아들을 제 손으로 죽일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는 아브라함을 생각하니 만약 엄마가 하나님이었어도 동생이 똑같이 행동했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어떨까. 만약 엄마가 하나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재물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쉽게 대들 수 있을까. 솔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만약 우리 엄마가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가졌더라면, 그래서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거나 혹은 벌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면 나는 과거의 많은 경우에 마음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을지언정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엄마와 언성이 높아질 때면 엄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네가 엄마를 무시하니 이렇게 행동을 하지’. 이 말을 들으면 속에서 반감이 든다. 나는 오히려 내 인격을 무시하고 존중해 주지 않아서 속상한데. 하지만 아브라함이 말인지 방구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명령을 찍소리 않고 따르는 것을 보자 엄마의 말이 조금 이해가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권력으로 얻은 순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엄마가 권력을 가졌었더라면 나는 엄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엄마의 권력을 따른 것이다. 신이 내게 외아들을 바치라고 한다면 나도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지만, 나라면 신이 가진 권력이 두려웠을 것이다. 명령을 거역했을 때 뒤따르는 후한을 감당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신이 감동하여 아들을 또 낳게 해 주기를 기도해 볼 것 같다.


이 작은 일화와 성경의 이야기를 비교한다는 건 어쩌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에 비교하면 엄마의 명령은 어쩌면 콩나물을 사 오라는 심부름 정도일 것이다. 심지어 그 새벽의 일은 명령(해라)도 아닌 부탁(해달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정말 하기 싫어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대한 과정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결론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고 자식들에겐 그것을 통보했다. 어렸을 땐 완벽한 일방통행의 관계였지만 나도 동생도 머리가 커지면서 더 이상 무조건적인 명령이 불가능한 지점이 왔다. 회초리질도 맞는 쪽 보다 때리는 쪽이 더 수고스러워질 때 즈음부터 엄마가 내게 자기를 ‘무시’한다고 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바랄 땐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해야 하고, 그리고 그 요구를 상대방이 납득하도록 배경을 설명하는 게 순서가 아닌지. 나는 이 뜻을 전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시키면 그냥 시킨 대로 하면 되지 네가 엄마를 무시하니까’라는 말 뿐이었다. 맹세코 엄마를 무시해서 대든 게 아니다. 다만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들을 땐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고 깨달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엄마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른 것임을. 엄마가 생각하는 부모는 자식 위에 있고, 자식은 그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공경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뭔가를 시켰을 때 토 달지 않고 ‘네 어머니’ 하고 움직이는 게 엄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이라면 나는 결국 엄마를 무시한 것이다.


나는 ‘이것 좀 해라’보다는 ‘이러이러해서 이걸 해야 한다’는 설명이 필요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면 신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까라면 깔 것이지 시건방지게 신에게 질문하려 든다고 벌을 줬을까, 아니면 그가 이해할 때까지 없는 이유라도 만들어 주며 그를 설득하려 했을까. 그 새벽 내가 느낀 싫음의 정도는 엄마와 내 생각이 다른 만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일일이 설명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설명 없이는 뭔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싫은 마음이 들 때면 아브라함을 생각할 것이다.



(작성일: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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