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가는 일상의 성적표다
2년 전쯤 치질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응가를 누면 꼭 피를 봤다. 생리 때처럼 변기 물이 온통 빨개질 정도였다. 이 전에도 가끔 이런 적이 있었지만 보통 2~3일이면 멈췄는데, 이상하게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응가를 누지 않았는데도 팬티에 피가 묻어 나올 때도 있었다. 검색해 보니 대장에 문제가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해서 걱정이 됐다.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우선 항문외과에 갔다. 항문외과에서도 대장문제인지 확인을 할 수 있다는 네이버 지식인 답변을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회사와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었고, 점심시간에 짬을 내 방문한 그곳에서는 대장문제는 아니고 치질이라며 수술을 권유했다.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치질은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게 아니니 살면서 언젠가는 한 번은 하게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대장 문제가 아니라니 안심은 했지만 치질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외적으로 증상이 없었고 응가를 눌 때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멈추지 않는 피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병원에서 하는 말이 상술일 게 뻔했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냥 하기로 했다. 살면서 언젠가는 꼭 한 번 하게 될 수술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수술이라는 의사의 말을 믿고 어떤 수술인지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 말대로 수술은 금방 끝났지만 한 달 동안 항생제를 먹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때 몸의 균형이 많이 무너졌다. 항생제를 오래 먹어야 했던 건 치질수술 때문만은 아니고 치질수술과 같이 했던 팔꿈치 쪽의 물혹 제거 후 꿰맨 상처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물혹은 어렸을 때부터 있던 것이라 제거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어차피 치질수술로 항생제를 먹어야 하니 동시에 수술한다면 굳이 추가로 항생제 복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권유했다. 이 말을 듣고 큰 고민 없이 승낙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 수술을 통해 몸에 칼을 대는 이상 간단한 수술이란 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도 병원은 여러 군데 방문을 해서 다양한 조언을 들어보고 삶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 고통은 참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때에는 몰랐다.
내가 받은 치질수술은 PPH 수술법이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일반 치질수술보다 고통이 덜하고, 무슨 신기술이고, 아무튼 좋은 점만 나오는데 만약 내가 다시 치질수술을 받는다면 일반적인 치질수술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 수술의 최대 단점은 바로 수술 방법에 있다. 기다란 기구를 삽입해서 치질을 제거 후 피부를 당겨 봉합하는 기술이다. 바로 이것이 의사가 강조했던 장점이기도 한데, 수술하는 입장이나 받는 입장에서 봐도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회복기간에서야 알게 된 것은 항문 주변의 촉각점의 위치도 변경되는 건지 수술 후에 나의 X꼬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 배꼽으로 비유를 하자면, 배꼽 정 중앙에 손을 댔는데 느껴지는 건 마치 배꼽 1~2cm 정도 주위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PPH 수술법 후기 글에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라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라고 적어둔다. 누군가에겐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인지와 감각에 괴리감이 드는데 이건 꽤 아리송한 기분이다. 뭐 지금은 익숙해져서 별 생각이 없다.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이 점만 아니라면 다른 부분에서는 만족한다. 하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최대한 수술을 안 하는 방법으로 치료만 받았을 것이다. 수술은 언제나 최후에 고려할 선택이어야 한다. 일반 치질 수술보다 고통이 덜한 것도 PPH의 장점이라고 하는데 내 경험상 어쨌든 수술은 수술이니까 몹시 아프다. 항문은 몹시 민감하고 연약한 기관이다. 그러니 돈을 좀 더 내고서라도 무통주사를 꼭 맞자. 무통주사는 추가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 수술법은 비교적 안 아픈 거라 안 맞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망설였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간호사가 열심히 번 돈은 이럴 때 쓰는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치질수술 후로 응가에 대해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회복기간에 응가 눌 때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면 예쁘게 생긴 응가를 누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설사를 해도 아프고, 염소똥 같은 응가가 나와도 아프다. 가장 아프지 않은 응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런 장애 없이 한방에 나오는 응가이다. 이런 응가를 생산(?)하려면 고구마 같은 것을 먹고 밀가루는 자제해야 한다. 이 전에는 내 응가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잘 챙겨 먹은 식단 덕분에 평생 처음으로 아름다운 응가를 보게 되었다. 썩 유쾌한 내용은 아니니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묘사는 생략하지만 어쨌거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응가였다. 그래서 예쁘다는 수식어보다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굳이 붙여봤다. 이 기념비적인 응가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나도 완벽한 응가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완벽한 응가를 누고 나면 조금 많이 과장해서 내 남은 모든 인생 역시 행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설사를 하거나 염소똥 응가를 본 날엔 나도 모르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한다. 또한 뭔가 잘못 먹고 있다는 몸이 보내는 정직한 소리이니 다시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예쁘고 좋은 응가는 마치 내 일상의 성적표 같다. 그래서 예쁜 응가를 누는 건 맛있는 걸 먹는 것만큼 행복하다. 좋은 음식을 먹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말이다. 행복이 별 거 없이 잘 먹고 잘 싸는 거라고 누가 그랬던지 정말 맞는 소리다.
(작성일: 2019.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