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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는 숨겨줘

2025년 1월 19일

by 양동생

저번에 누나 자리에 응급상자를 올려두었다. 별 뜻은 없었다. 정말로. 그저 누나가 술을 많이 마시는 날이 많았고, 다음 날 힘들어하는 걸 몇 번이나 봤기 때문에, 그 안에 컨디션 숙취 해소제들을 잔뜩 넣어두려던 것뿐이었다.


기프티콘을 주면 절대 받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런 방식이라면 조금은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치는 일이 생기면, 그 안에 있는 소독약이나 밴드 같은 것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싶었다.


나는 그날 휴가라서 집에 있었다. 그리고 누나에게 카톡이 왔다.


"이거 뭐야?"


사진 한 장과 함께 온 메시지였다. 누나 자리 위에 놓인 응급상자.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장을 보냈다.

"그냥."


잠시 답이 없던 누나는 다시 한 줄을 보냈다.


"다음부터는 숨겨줘."


나는 그 말이 혼내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따뜻한 꾸짖음 같은 거였다. 진짜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저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자기 자리 위에 있다는 사실에 잠깐 당황한 것뿐이겠지. 어쩌면 누나는 이런 식의 배려가 낯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하는 게 익숙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챙기는 것. 말로 하면 쓸데없이 무겁고, 직접 건네면 거부당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조용히 흘려보내듯 놓아두는 것. 마치 비 오는 날 누군가 우산을 두고 간 것처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쓰이길 바라면서.


그날 저녁, 누나는 응급상자를 그대로 두었을테다. 상자를 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언젠가 안에 있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쓰이길 바라본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놓아둘 것이다. 누나는 앞으로도 그걸 발견하고, 잠깐 당혹스러워하다가, 언제나처럼 조용히 받아들여줄 것이다. 너무 직접적이지 않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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