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1일
전화는 단순한 도구다.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반응하는 일.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는 묘한 온도가 있다. 같은 대화라도 직접 만나서 하는 것과 통화로 하는 것은 다르다. 누나는 늘 바쁘고, 만남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가끔 통화를 시도한다.
통화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분하다. 상대의 눈빛을 읽을 필요도, 제스처를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오직 목소리와 그 뒤에 감춰진 무언가에 집중하게 된다. 말과 말 사이의 틈,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그 짧은 공백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곱씹어 보게 된다. 그 틈을 메울 것인지, 그대로 남겨둘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때로는 그냥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대화가 얼마나 충실한가는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남느냐의 문제다’ 말의 방향보다 말이 끝난 후 남는 여운이 중요하다. 통화도 마찬가지다. 통화를 끝내고 나면 가끔 묘한 기분이 남는다. 어떤 날은 가벼운 충만함, 어떤 날은 알 수 없는 공허함.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 있었고, 그것이 나와 누나의 관계를 새삼 연결해 준다는 사실이다.
나는 통화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다. 누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듣고, 내 이야기를 나누고, 굳이 말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을 공유하는 것.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충실한 대화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통화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상대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대화의 역할에 대해 많은 말을 남겼다. 가령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언어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곧 우리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철학적 논의를 떠나, 나는 그저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통화가 끝난 후에도 그 여운이 남아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충분히 충실한 대화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설하고 오늘 대화다운 대화를 짧게 할 수 있어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