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2일
회식 자리에서 우연히 누나를 보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늘 존재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언제나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진다. 무언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말이 적절할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인사를 하면 될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술잔을 채워주면 좋을까? 너무 어색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뭔가 따뜻하게.
덕질이라는 건 묘한 감정의 교차점에 존재한다. 가까이 가고 싶지만,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잘 챙겨주고 싶은데, 과하면 오히려 불편함이 될 수도 있다. 잘한 덕질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아닐까.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이런 태도는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의 '적절한 거리' 개념과 맞닿아 있다. 그는 진정한 친밀감이란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도, 너무 멀어지지도 않는 미묘한 균형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덕질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마치 적당한 온도의 온기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야 한다.
회식 자리에서 누나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당히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웃고, 가끔은 가만히 잔을 바라보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 있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괜히 신경이 쓰이고, 괜히 말 한마디를 더 걸어보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 하지만 잘한 덕질이란, 굳이 무언가를 더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마치 좋은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음악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고, 너무 멀어지면 그 온기를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거리가 무너졌을 때의 이야기다. 적당한 거리에서 존재하는 타인은 오히려 따뜻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잘한 덕질이란 조용히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작은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그날, 누나가 잔이 비었을 때 너무 빠르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늦지 않게 한 잔을 채워봤다. 그게 잘한 덕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은 어색하지 않았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잔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