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오랜 글동무 상이와 장흥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점심을 먹고 클래식 엘피판을 틀어주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영국풍으로 꾸민 카페에는 홍차 진열장과 오케스트라 엘피가 어우러졌다.
계산대 밑 선반에는 범우사 문고본 전집이 빼곡했다.
옛날 친구를 우연히 만난 듯 책들을 뽑아보며 반가워했다.
우리의 들뜬 모습을 본 카페 주인이 판매도 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상이가 신이 나서 내게 한 권 골라 보라고 했다.
나는 105번 <찰스 램 수필선>을, 상이는 206번 A. 밀른의 <한 가닥 공상>을 골랐다.
우리는 가슴에 책을 품고 벽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공간으로 갔다.
피아노가 있었고 정면으로 보이는 벽 선반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클래식 엘피판이 가득했다.
우리는 주인에게 음악 소리를 키워 달라고 부탁하고, 차를 홀짝이며 각자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찰스 램의 첫 번째 글은 요즘 말로 하면 19세기에 명예퇴직을 당한 필자의 이야기다.
생계에 대한 걱정, 나이듦에 대한 회한과 위로. 21세기 현재에도 유효한 감정이었다.
잠시 내가 과거 19세기 사무실 밖으로 나와 혼잡한 도로를 걷는 모습을 흑백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이젠 기쁨을 쫓지 않고 기쁨으로 하여금 내게 오도록 한다.’
문장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이어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사실 나는 정말 액면상으로는 50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 세월에서 나 자신에게가 아니고 타인에게 살아준 시간을 빼보라/ 그러면 내 나이 아직 젊은 청년임을 인정할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것이 정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오직 진정한 시간이요…’
퇴직자가 된 작가가 스스로를 북돋는 문장이었다. 위로가 내게도 전달됐다.
그런데 문장을 반복해서 읽다가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나는 타인에게 살아준 시간을 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은 이미 나이므로.
찰스 램 식이라면 이타적인 사람은 영원히 영유아겠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데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다.
뭐라고? 하며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두 시간 동안 수필 한 편도 다 못 읽었다.
옛날식 표현으로 쓰여 지루했다. 아니, 복잡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여기서 멈춰있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도 다른 책을 뒤적거린다.
일주일 후 다시 만난 상이는 <한 가닥 공상>을 다 읽었다고 했다.
옮긴이의 말이 내 마음에 닿을 거라며 책을 내밀었다.
‘그의 본령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두고 따뜻한 이해와 동정 어린 눈으로 그들을 들여다보고 인생의 비밀을 다정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이 세상을 희극의 세계로 보고 항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지켜보고 있는 듯싶다.’
그래, 딱 내 마음으로 들어온다.
9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어느덧 서로의 취향을 알고, 인정하고, 서로가 인상 깊게 읽을 문장을 건넬 수 있는 사이가 되었구나.
작년만 해도 우리는 대화하려면 윤색을 거쳐야 했다. 성향이 다른 우리는 같은 의미를 각자의 문장으로 말하는 바람에 언성을 높일 적도 많았다.
이제 우리는 서로 상대의 문장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친 듯하다.
"찰스 램은 어땠어?" 상이가 물었다.
"복잡해."
복잡해서 오랜 시간 생각하게 하므로 천천히 알아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언젠가는 당신을 완독하겠습니다. 그리 되도록 살겠습니다.
A. 밀른은 좀 나았다.
같은 한국어 번역이라도 지금에 가까운 언어라서 아무래도 이해하기 쉬웠으려나.
우리가 또래에게 더 쉬이 공감하듯이 말이다.
옮긴이는 밀른의 글을 평범, 이해, 다정, 유머와 같은 단어로 설명했다.
어느 시대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한 가지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매료되어 술술 읽어 나갔다.
후반부로 갈수록 얼른 다음 글이 읽고 싶어서 제목도 제대로 읽지 않고 문장 끝을 날려 읽었다.
문득, 질문이 들어왔다.
좋은 글을 만났는데 왜 정독하지 않지?
내용의 깊이를 잊은 채 재미에만 흠뻑 빠졌다.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편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가 있듯이 말이다.
어렵고 거리감이 있는 사람을 오히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오래도록 관계를 지속하고, 친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해 소원해지기도 했다.
나는 문장을 흘려 읽기 시작한 부분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페이지를 함부로 넘기지 않기로 했다.
찰스 램처럼 어려운 책은 천천히, 한 문장씩 곱씹으며 읽는다. A. 밀른처럼 술술 읽히는 책은 더 천천히, 한 문장도 흘리지 않으며 읽는다. 완독이 목표가 아니다. 함부로 넘기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터득한 완독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