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와 회의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나의 20대.
20대 때 나의 선택 기준은 내 마음을 뛰게 하냐 아니냐였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모집하는 봉사단 소속으로 캄보디아에 한 달간 간 적이 있다. 그때 'Banteay Pireb'이라는 (우리말로 하면 비둘기센터)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애인직업기술학교에서 지냈는데 그곳에는 신부님과 활동가들이 공동체를 이뤄 살면서 활동하고 계셨다. 그곳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보며 너무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런 삶의 방식도 있구나 싶었다. 나무집에 에어컨도 없고 물도 빗물을 받아 정수시켜 마시고 벌레가 많고 모기장을 치고 자야 하는 곳. 그렇지만 무수히 많은 별들을 볼 수 있고 웃음이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을 볼 수 있고 그들과 어울려 살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에서의 체험 후 나의 꿈은 NGO 활동가가 되었다.
학교 수업보다 외부에서 하는 NGO 관련 강의들을 더 열심히 찾아 듣고 관련 책들을 읽으며 꿈을 키워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Banteay Prieb'에서 2년 간 홍보/행정 일을 하며 지냈다. 행복했다. 'Banteay Prieb'은 예수회 신부님들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었는데 종교색이 전혀 없고 오히려 캄보디아의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스님들이 학교에 와서 학생들과 함께 기도했다(캄보디아는 불교국가이다.). 전도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삶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모습이 (그 당시에는) 종교가 없던 나에게 너무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신부님과 활동가들은 모두 캄보디아어로 캄보디아 직원들, 학생들과 소통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더욱더 그곳에서 살면서 부대끼면서 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종교, 성별, 인종, 언어에 상관없이 모두를 환대하는 곳. 모두의 존재를 귀하게 대하는 곳.
캄보디아에 가기 전에 2주 간 한국에서 합숙을 하며 활동가들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NGO 쪽에서는 꽤나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신 거 같았는데 그분이 한 말 중에 자신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했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냥 검소하게 살게 되었다고 말하면 되지 굳이 '자발적 가난'이라는 근사한 말로 포장해야 하나 싶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무슨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에서 일하며 다른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NGO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한 종교인이 운영하는 NGO에 가니 그곳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분이 유창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그게 너무 (나쁜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아마 내가 있었던 곳은 모든 외국인들이 캄보디아어를 배우고 서툴러도 손짓, 발짓까지 써가며 캄보디아 사람들과 소통했던 곳이라 그랬던 거 같다.
또 다른 NGO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곳이었다. 활동가들이 그곳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자 그곳에서 사는 아이들이 쭈르륵 나와서 한 명씩 매우 유창한 한국어로 (발음까지 한국인 그 자체였음)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NGO의 센터장은 이곳 아이들은 영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처럼 빡세게 교육을 시킨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무리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라고 해도 고아가 아닌데 굳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게 하면서 한국식 교육을 시키는 게 맞나? 싶었다.
물론 그 아이들은 한국어, 영어가 유창하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후에 좋은 직업을 구해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증명해야만 하고 그렇게 동정심을 유발하여 후원금을 받는 것이 맞나? 싶었다.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게 맞나? 하는 질문만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 쓰다보니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한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국제개발협력강의 시리즈를 신청해서 참여한 적이 있는데 수강생들끼리 조를 이뤄 조모임을 한 적이 있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데 한 사람이 자기는 이름이 뭐고 서울대 재학생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을 시작으로 다들 자기의 이름과 출신 학교를 밝혔다. 모두 다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자기소개 하는데 굳이 왜 자기 출신대학을 밝히나 싶어서 내 이름만 말했다(반골기질 발동. 저는 이름이 뭐고 피자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할걸 그랬나. ) '인권', '정의'에 관심을 갖고 모인 사람들끼리 출신대학부터 까고 시작하는게 우스웠다.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다면 뭐가 맞지? 어떤 것이 정의지? 어떤 것이 인권적인 것이지?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지? 하는 답이 없는 질문들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결국 나는 NGO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에겐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있었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었고, 너무 복잡했다. 난 복잡한 것이 싫다. 답이 있는 것이 좋다. 영화도 열린 결말이 싫다.
어느 날 유퀴즈에 나온 박주영 판사님을 보았다. 박주영 판사님은 명판결문으로 유명하신 분인데, 동반자살을 하려 했던 청년들에게 (청년 세 명 중 한 분은 결국 사망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살아남았다. 그 두 명은 '자살방조죄'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판사님은 그냥 판결을 하면 또다시 그 청년들이 자살을 시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판결문으로나마 따뜻하게 위로하고, 청년들에게 집에 갈 수 있는 차비와 조카 선물을 살 돈을 사비로 쥐어주셨고, 후에 직접 전화까지 하여 근황을 살피셨다. 정말 존경스럽다. 그분에게 ‘나를 가장 똑바로 서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염치’라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판사님의 답변을 듣고 20대의 나를 떠올리게 됐다. 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들에 파묻혀 결국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활동가의 길을 포기하게 된 거 같다.
20대 때 나는 스스로가 바다 위를 목적 없이 둥둥 떠다니는 돛단배처럼 느껴졌다. 뿌리 없이 그저 바다 위를 부유하는 존재. 그러다가 로스쿨에 가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것 같은 충만함을 느끼기 시작했다(공부가 힘든 것과는 별개로). 그때보다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결국 20대의 나는 너무 대쪽 같아서 꺾여버린 것 같다. 그 후에 꿈을 찾아서 다행이지만서도(지금으로선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친구의 말처럼 의심하지 말자.)
아무튼 너무 비장하게 살면 힘들다. 너무 비장하게 살지 말자. 그저 행복하게만 살자.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유연하게 살자. 나에게 하는 말이다.
여하튼 박주영 판사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