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딸기파덜)
2018년 7월1일, 오스나씨가 아닌 오렌지는 38년만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독립을 이루어낸다. 사실 큰 노력은 하지 않았다는 게 함정. 끈질기게 요구했던 것도 투쟁을 해왔던 것도 아니다. 동생이 결혼해서 나가고 어무이랑 단둘이 살고있는 마당에 나까지 나간다 해버리면 뭔가 큰 딸의 도리상 이건 아닌것 같아서... 그냥 뭐 그런 복잡꾸잉한 감정덕분에 엄마 vs 딸 사이 특유의 다툼이 계속됨에도 불구 관성이 유지되었다.
헌데 그냥 그렇게 스무스하게 이 물에 내 몸을 뉘이면 어디로 흘러갈런가 두둥실 하다보니 독립이 진행되어져있더라. 세상만사 이와 모두 같을 지니.....
2005년 대학 4학년, 국제회계 기말시험을 보던 중 전화를 받고 시험장을 뛰쳐나갔다. 불가사의하게도 당시에는 시험 때도 곧잘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고 그랬던 것 같다. 동일한 기억 몇 개가 머릿속에 더 남아있다. 다시 돌아와서, 아빠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평소에는 잘 타지도 못했던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빠 나 믿지? 내가 잘할게.'라는 말을 전하자 아빠는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끈질기게 부여잡으며 버티고 있었던 그 생명줄을 비로소 놓고 편안해 지셨다.
내가 아빠와 한 약속과 당시의 정황은 나에게 큰 책임감을 부여해왔었다. 이후 연애들에 실패하며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린 것도 약속을 지키라는 뜻에서, 집에 전념하라는 뜻에서 아빠가 방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단한 도움은 주지 못했어도 당시 우리집에서 수익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던지라 내가 다른 가족의 일부에 걸치게 된다면 집안기둥이 흔들렸을테니까. 2014년 12월, 동생의 결혼식에서 좋다고 헬렐레 씐나게 축가를 불렀더니 엄마가 크게 웃어줘서 좋았다. 2015년, 동생이 ㅇㅇ시 공무원이 되었다. 아빠, 이제는 나도 좀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 아직 뭐가 더 남은걸까? 하며 그냥 그런 일상속에 몸을 맡기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더라.
그리고 엄마 옆에는 2007년경부터 지금까지 줄곧 엄마를 지키고 계시는 어떤 분이 계신다. 처음에는 아빠의 지인이기도 하여, '이건 아닌것 같습니다!' 류의 문자를 보내기도 했지만, 엄마한테 잘하는 변함없는 모습에 가족으로 받아들인지 오래되었다. 엄마는 두 딸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대 아저씨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고, 아저씨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2018년 초, 나는 엄마에게 화를 냈고, 아저씨께는 전화를 했다. 우리집에 너무 자주 오시는것 아니냐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돌하고 버릇없는 행동이었겠지만 나는 당시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주말마다 편한 옷을 입고 쉬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우리'집인데 그렇게 불편하게 있는 것이 화가 났다. 그리고 여파로 본인은 독.립.을 하게 되었다. 모두가 윈윈하는 슬기로운 방법을 찾다보니 이런 쌈박한 결과에 수렴했다는 이야기. 나는 아저씨가 살고 계시던 집으로, 그리고 아저씨는 우리집으로 서로의 집을 맞교환하게 되었다. 아 물론 엄마는 속상해했다. 결혼을 해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이는 서른여덟이지만 모든 것이 부족해보이는 내가 혼자산다고 하니 무진장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집에 오려고 하셨지만 지금은 우리 둘다 잘 적응하고 산다. 물론 엄마가 마음을 놓은 것은 꽁냥꽁냥☆할 딸기씨가 옆에 있기 때문이라는 건 잘 알고있다.
너무 진지모드로 빠져서 본인도 심히 마음이 꾸잉꾸잉하다. 험험. 리프레쉬. 푸쉬푸쉬. 아 그래서 둘이 어떻게 만나는 거냐고? 나도 입이 간지러워 죽겠다. 이제 쓸게 진짜로.
아저씨는 이미 결혼을 하여 잘 살고 있는 동생네와 다르게 함께 모일 때마다 홀로 있는 내가 안쓰러우셨던 것 같다. 살고 계신 동네에서 자치위원을 맡고 계셨고 주민센터에 신임공무원이 부임해서 올 때마다, 기타 등등 여러 지역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도 내 명함을 뿌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연락 한번 해보라고 옆에서 푸쉬를 그렇게 하셨단다. 그래서 딸기씨도 그렇게 만난거냐고? 놉. 수년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아저씨의 영업은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다 그들의 복이 거기까지이니라.
2018년 7월, 독립을 완료하여 안정기로 접어들 즈음, 그날도 아저씨는 이전 인맥을 활용하여 새로온 공무원 청년들을 상대로 열혈 영업중이시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우셨던 것인지 당시 옆옆동 동대표를 맡고 계시던 한 중년의 남성이 슬쩍 와서 아저씨께 말을 건넸다.
"송위원... 나도 아들이 있는데....."
"아들 결혼한거 다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여?"
"둘째 아들도 있딩! ^_^"
두 분은 왁자지껄한 회식자리를 매몰차게 박차고 뛰쳐 나오셔서는 인근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으셨다. 그리고 두 아저씨들간 탐색전 및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아저씨는 늘 품고 다니시던 내 명함을 둘째 아들도 있다는 중년의 남성에게도 건넸다. 투자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매번 그냥 무시했던 것이 실수였다. 둘째 아들의 명함은 사진으로 그의 아버지께 전송되어져 왔다. 그리고 아저씨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네네 그렇습니따. 중년의 남성은 바로 딸기네 파덜이십니다.
사실 두 분은 일면식은 있으셨지만 그닥 친분관계가 있으셨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급기야 베스트 술친구로 거듭나시기까지 하는데...쩜쩜쩜....투비컨티뉴드...가 아니고 아저씨들의 이야기는 논외로 하는걸로.
오렌지야.. 서론이 너무 길다..
그래서 꽁냥꽁냥 연애는 언제하는 거니?
아직 갈 길이 멀다.. 계속 이어서 부지런히 쓰도록 합죠. 꾸잉꾸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