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양다솔 작가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라는 에세이를 읽다가 잠들었다.
아, 에세이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특별한 경험 속 공감되는 생각, 평범한 일상 속 특별한 삶의 방식, 가볍게 표현한 작가의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유쾌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에세이라 할 수 있지. 암암.'
에세이라고는 이제 겨우 열댓 권 즈음 읽는 초짜 독서인간의 눈은 날카롭고도 높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 호로록 읽어 내려가기 쉽지 않은데, 잘 쓰인 이 책은 읽는 내내 만족감이 들었다.
한편, 그러면서 내 글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쓰려고 하는 에세이는 에세이가 아니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나 혼자 의미 부여하는 일기는 아닐까? 누가 내 글을 읽고 싶어 할까? 사람들에게 보이는 브런치글마저 고작 이렇게 써서 내도 되는 걸까? 온갖 물음표가 밤을 지새우고 아침까지 나를 속박한다.
열심히 글 쓰겠다고 선언한 지 하루 만에, 작가열차는 덜컹덜컹 탈선 위기다. 스스로 느껴버린 부족함은 그 누구의 말보다도 날카롭다.
‘내 글은 특별함이 없어.’
‘했던 말만 계속 반복해서 내가 봐도 지겨워.’
‘짜릿함이 글에 묻어나지 않아. 재미없어.’
‘나는 아까운 전기와 서버용량만 낭비하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예전의 그 깔짝충이 아니다. 성공을 하든 못하든, 재능이 있든 없든, 이대로 관둘 수는 없다. 국가대표 깔짝충 은퇴선언이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되새긴다. 처음을 망치는 건 피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성장하려면 지금 이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이 부끄러움과 모자람, 보잘것없는 나를 견뎌내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 그 사실을 계속 되새겨본다.
걸음마를 딛기 위해, 엉금엉금 일단 기어 다니는 아기처럼, 보행기에 의지해 조금씩 일어나 보려는 그 아기의 노력처럼, 그렇게 하나하나, 나의 글쓰기 여정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감동받고 칭찬해 마지않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응원해주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엉금엉금 일단 기어라도 본다. 조금 더 다리에 힘을 주어보고, 넘어져도 봐야지.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니는지를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그렇게 실망하는 오늘보다는 기대되는 내일을 살아야지.
덜컹덜컹 작가열차,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