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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문 Mar 28. 2023

저녁 몇 시에 드세요?


저녁은 6시에 먹는 거 아닌가요?


꽤 오랜 시간동안 나는 ’저녁은 6시에 먹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유년기에 늘 그렇게 먹어왔고, 석식도 그 시간에 제공되었으니 당연하게만 여겼다. 그래서 통학하던 대학생 시절엔 수업을 마치고 늘 밖에서 저녁을 사먹고 집에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면 7시가 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시생 시절에도 6시의 저녁시간은 불문율이었기에, 나는 그렇게 6시의 저녁이 당연했다.


필리핀은 좀 다를 수도 있지!


7년 전 즈음, 필리핀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의 일이다. 필리핀 대학교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 약속시간은 ‘수업 끝나고 저녁시간’으로 모호하게 잡혔다. 하지만 몇 시인지 되묻지 않았다. 당연히 저녁 6시를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6시에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식당은 텅 비어있고, 필리핀 친구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머지않아 7시쯤 되어 속속 나타난 친구들. 내가 ’저녁을 이렇게 늦게 먹어?‘하고 묻자, 필리핀 친구는 ‘저녁시간’이란 보통 7시-8시를 뜻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12시에 점심을 먹고, 7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가 있다니. 당시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필리핀은 해가 길어 7시에도 환하다보니, 뭐 그 나라 문화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녁을 9시에 먹는다고요?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꼬박꼬박 저녁을 맞추어 먹던 나는 어느덧 취준생이 되었고, 집에 콕 박혀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가족들이 저녁시간을 다 지나 8시가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가족들이 9시쯤 집에 도착해서 밥을 슬슬 차려먹기 시작했다. 그렇다. 당시의 우리 집은 9시에 밥을 먹는 집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충격이 가시질 않는다. 저녁을 9시에 먹다니! 어쨌든 나는 집에 기생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알아서 6시에 밥을 차려먹거나, 주전부리를 찾아 헤매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취직을 한 나는 집에서 2시간 거리의 지사에 발령을 받았다. 자취방을 구하지 못했기에, 일단 회사에 다녀와 집에 도착하면 9시가 다 되었다. 저녁을 먹지 않은 채로 2시간의 대중교통 및 도보를 이용해 집에 도착하면 이미 뻗어버리고 만다. 저녁식사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결국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결심을 하고, 회사 동기를 잡아 매일같이 술을 곁들여 저녁을 거나하게 먹었다. 그 덕에 인턴시절의 월급은 내 뱃속으로 녹아 없어졌지만, 그만큼이나 제 시간에 저녁을 먹는 일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


독립하여 저녁시간을 쟁취한 줄 알았지만...


그렇게 긴긴 출퇴근길에 못이겨 독립을 선언. 나는 자취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저녁을 6시-7시 사이에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안정적인 기분이 들었다. 저녁 7시 전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워라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도 잠시 뿐,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고, 주어지는 업무가 많아지면서 저녁 6시에 식사는 개뿔, 제 시간에 퇴근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초보 야근러 시절엔 그래도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가서 저녁을 먹고 일했다. 그러나 저녁을 먹고 돌아오면 11시 12시에 퇴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마침내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10시의 떡볶이, 라면, 혹은 빠른 취침을 선택하게 된다.


늦지 않게 저녁 먹는 삶


물론 국룰로 정해진 저녁시간은 없지만, 9 to 6의 출퇴근자에게 6시에 저녁식사를 고민할 수 있다는 건 우리나라에서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소박한 꿈이 하나 있다면, 너무 늦지 않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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