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집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 모아놓은 돈에 맞추어서 앞으로 아이들 키우기 좋은 동네이면서도 나는 1층이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첫째가 3살일 때 걸음마를 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모든 이동은 뜀박질이 었던 아이를 데리고 9층에서 산다는 건 매 순간이 가시방석이었다. 뽀로로 매트를 깔아도, 아래층에 수시로 뇌물을 드려도 불편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고 뛰는 게 당연한 아이에게 뛰지 말란 소리는 하기 싫어 나는 과감히 1층을 구입하겠노라고 마음을 먹었었다.
1층은 한 라인에 1개씩밖에 없기 때문에 매물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몇 달간 1층으로 나온 매물은 다 돌아본 것 같다. 일반적으로 집을 고르듯이 가격이 맞아야 했고, 너무 구축은 아니어야 했고, 미래에 아이가 다닐 학교도 가까워야 했다. 거기다 1층을 고를 때는 조건이 더해졌다. 저층이지만 사생활 보호가 어느 정도 되어야 했고, 일조량도 충분해야 했고, 음식물 쓰레기장과는 거리가 있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일 년에 한 번 하는 이사는 지긋지긋했고 내 집에 대한 로망이 짙은 만큼 완벽한 첫 집이어야 했다.
첫눈에 반한 운명 같은 집이 나타났으면 좋으련만, 더 이상 만삭인 몸으로 더 매물을 보러 다닐 수 없을 때 그간 본 집 중에서 적당한 집을 계약하고선 너무 일찍 무리해서 집을 사는 건 아닌지, 주변의 만류에도 1층을 고집한 게 과연 잘한 짓인지 이사하는 날까지 조마조마했었다.
이삿날 낯가림이 심한 첫째가 우리 집 아니라고 안 들어온다고 울어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아이는 옛날 집은 눈곱만큼도 생각나지 않는 듯 온 집안을 활보하며 뛰어다니자 나는 그때서야 안도했다.
이사를 하고 둘째를 낳고 또 그 뒤로 아이 하나를 더 낳아 우리 가족은 5명이 되어 방 4개를 다 채울 인원이 되었다. 뛰고 날고 하던 첫째부터 둘째 셋째까지 우리는 이 집을 10년이 넘도록 옴팡지게 잘 쓰고 있는 거 같다. 아이들이 집안에서 맘껏 뛸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내가 쉬는 날이면 우리 집은 동네 놀이터가 되기 일쑤였고, 밤까지 체력이 남은 우리 아이들은 집과 놀이터를 구분하지 못한 채 신나게 커가고 있다.
아이들이 뛸 수 있다는 것 외에도 1층은 우리 가족을 정말 편하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쩌면 그렇게 챙길게 많은지 잠시 외출이라도 하려면 두세 번 드나드는 건 당연했고, 유치원 차 시간을 맞출 때도 오로지 달리는 시간만 계산하면 되었다. 밖에 나가보고 생각보다 쌀쌀하면 얼른 들어가 점퍼를 챙겨 올 수도 있었다.
남쪽에선 보기 어려운 눈이 왔을 때 아파트 전체 아이들이 다 나와 눈이 쌓일 틈도 없이 걷어다가 눈을 뭉칠 때도 우리는 우리 집 앞에 소복이 쌓인 눈을 만끽했다. 거긴 분명히 공용공간임에도 남의 집 앞이라 그런지 아무도 오지 않아 우리만의 발자국을 찍고 눈사람다운 눈사람도 만드는 추억을 안겨주었다. 그 눈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거실에서 며칠간 지켜보는 일은 예상하지 못한 잔인한 사건이었지만.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아이건 어른이건 집이 너무 좋다고 칭찬을 늘어놓으신다. 아이들 키우기 좋고 앞에 정원이 따로 없다며… 그렇다고 막상 1층을 사는 사람은 없더라. 집을 살 때는 차후에 파는 일도 생각해야겠기에 내가 이 집을 살 때 했던 걱정들을 똑같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어머니는 아직도 ‘나중에 높은데 훤한 데로 이사 가면’이 주 레퍼토리다.
이제는 여기저기 수리할 곳도 생기고 우리 집 공주들은 구해줘 홈즈를 보면서 우리도 저런 집에…라고 푸념하지만 나는 행여나 다른 데로 이사할 마음이 서질 않는다. 조건에 맞는 집을 찾으러 다니고 이사를 하는 일이 너무 싫기도 하거니와 축구며 야구며 줄넘기에 달리기, 땅따먹기, 온갖 놀이로 깔깔대던 이 집이 너무 그리울 꺼란 생각이 든다.
나는 아무래도 생애 첫 집에서 손주까지 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