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고등어 꺼내서 애들 맥여라

by 아하아하

"냉장고에 고등어 꺼내서 애들 먹여라"

할머니께서 앰뷸런스에 실려가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구순이 넘으신 우리 할머니는 정정하셨다.

혼자 사시면서 밭농사를 지으셔서 일년내내 채소가 넘치도록 주셨고, 우리집 냉장고,냉동칸은 빌틈이 없었다. 4월이면 고추모종을 300개씩 사다 손수 다 심으시고, 호박, 오이, 가지, 감자, 고구마, 토마토, 옥수수 같은 작물들도 애들(할머니의 증손자들)이 좋아한다고 해마다 심으셨다. 상추나 정구지는 흐드러지게 가져오면 이웃들과 나누기 바빴고 파, 양파, 콩도 할머니 성화에 음식마나 넣어서 먹었다. 매실은 어느틈에 딴건지 단지마다 발효액을 담가 페트병에 옮겨둔걸 주시면 음식에 아끼지 않고 넣었다. 고추를 따다가 널어 말리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면 그 자리엔 다시 배추를 심고 무도 심고, 김장준비를 하셨다. 김장철엔 여름에 뽑아서 널어놓은 마늘을 열흘 넘도록 까두시면 우리는 배추, 무를 뽑아서 절여 김장을 했다. 겨울이 되면 쉴만도 한데 할머니는 고추장을 담고, 메주를 띄우고 된장을 담고 간장을 뺐다. 긴겨울바람의 칼날이 무뎌질 때면 밭에서 할머니는 또 겨울초며 정구지를 캐다가 한보따리 주셨다. 첫 정구지는 사촌도 안준다며 아무도 주지말고 우리먹으라는 당부도 해마다 잊지 않으셨다. 조그만 밭이 할머니 성에 차지 않았는지 온 동네를 다니시며 쑥이랑 머위도 캐셨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올라치면 멸치 사러 가자고 전화하신다. 젓갈 담을 멸치를 사러가는게 할머니가 가장 멀리 외출을 하는 날이었던것 같다.

할머니는 해마다 반복되는 이 엄청난 일들을 하실때마다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올해 해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많은 일이 힘에 부치면서도 내년엔 못할지 모르니 많이 담가둬야 한다고...10년이 넘도록 그 말씀을 할때마다 나는 투닥거렸다. 이렇게 정정한 할머니가 어떻게 될리가 있나. 괜히 농사일 한다고 힘들이지 말고 제발 조금만 하시라고. 그런데 그날이 와버렸다.


할머니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먼밭에는 먹거리를 심으시고 마당에는 꽃을 심으셨다. 나이든 사람이 무슨 재미가 있나, 요 예쁜거 피면 그게 재미지 하시며 혼자 지내시는 적적함을 달래셨던거 같다. 자그만 화분에서 피는 꽃말고 엄청나게 큰 정원에서 끝도 없이 핀 꽃을 보여드려야지 한게 몇년째였다. 부처님 오신날 할머니께 절에 가지말고 꽃구경 시켜드리려고 전화를 드렸다. 미리 전화하면 오지말라고 하실게 분명하니 아침에 출발하면서 전화를 드렸더니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또 밭에 가셨나....

할머니 댁에 도착했지만 현관문은 잠겨있고 전화를 걸었더니 집안에서 전화소리가 나길래 이상하다 싶었다. 그냥 돌아가려다 아이가 거실문이 열린다고 들어가보았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러러어러러....

신발도 못벗고 뛰어들어갔다. 매트넘어로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옆으로 누운채로 바르르 떨고계시는. 눌린 손이 퍼래져도 꼼짝을 못하는.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시는. 나는 패닉이 와버렸고 허둥대며 소리쳤다. 119!, 119! 남편이 할머니를 안아다가 다시 침대로 눕히자 할머니는 한손을 내저으며 웅얼웅얼 하셨다. 계속 반복된 소리는 조금 지나자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 병원 ....안간다....

평소에도 할머니는 '쓰러지면 절대 병원데려가지 마라. 호스 꽂지 마라' 늘 말씀하셔서 나는 웅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었지만 119는 이미 불렀고 이 상황에서 병원을 안갈수는 없었다.

구급대원이 도착했고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언제부터 이러셨나. 마지막으로 통화한게 언제인가. 백신은 맞으셨나. 나는 하나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앰뷸런스에 실려가면서 삼촌이랑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소식을 알리는 것보다 할머니랑 마지막으로 통화한게 언제인지가 더 중요했다. 구급대원은 이송가능한 병원을 알아보시느라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할머니의 상태를 브리핑했다. 브레인 스트록이 의심되고 혈압이 얼마이고 의식은 있고... 코로나 상황으로 4번 전화를 걸어서야 수용가능한 응급실을 찾을 수 있었다. 구급대원은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걸라고 하시고 직접 걸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의식을 잃지 않으셔서 어눌했지만 분명하려고 애쓰는 말투로 대답을 하셨다. 위용위용 소리나고 덜컹거리는 앰뷸런스에서 할머니는 계속 무언가 소리를 내셨고 그 와중에 나는 이 말을 알아듣고는 엉엉 울어버렸다.

"냉장고에.. 고등어..꺼내서.. 애들... 맥여라.."

지금 이 상황에 이게 무슨 말인가. 할머니 몸상태가 지금 이런데 그저 우리가 밥 먹었는지 그게 중요한가. 나는 계속 목이매여 아무말을 못해 할머니의 시퍼런 손만 계속 주물렀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는 옌세를 고려해 수술을 할건지 물어봤다. 우리는 수술을 선택했고 수술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병원은 코로나로 한명만 들어갈 수 있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병원 밖 차안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지자 우리는 정말 할 수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를 병원에 두고 돌아오면서 나는 조금씩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병원이 싫다고 했던건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면서 가족들을 못 볼바엔 하루라도 온가족 모여서 같지 있는게 낫지 않았을까. 할머니가 제일 싫어하는 호스를 꽂은 모습이 미안하기만 했다.


밤늦게 할머니댁을 정리하러 왔을때 나는 무엇 때문인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냉장고에 고등어..." 이말이 너무 서글프게도 계속 맴돌았다.

할머니가 힘들게 마련한 생선인데 썩히면 안되지. 냉장고를 모두 열어보았지만 할머니가 애써 발음하려던 고등어는 없었다. 다시 눈물이 났다. 할머니 드실 거라곤 자질구레한 반찬들뿐이면서 밥 잘먹고 다니는 손주들이 뭐가 걱정이라고. 몇시간을 찬 바닥에서 꼼짝못하면서도 손주들 밥먹일 생각만 하신것 같아서.


다행히 할머니는 5일뒤에 일반병실로 옮겨졌고, 조금씩 회복했지만 왼쪽 마비에 어눌한 말투, 혈관성 치매라는 후유증이 남았다. 일년이 넘도록 재활치료를 했지만 다시 예전처럼 걸을수도, 손주들을 반기는 밝은 표정을 지을수도 없었다. 할머니 말씀처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년이 와버렸다. 할머니의 시나리오에는 없던 미래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높으신 연세에도 해마다 미래를 꿈꾸시면서 행복해 하셨던것 같다. 씨앗을 뿌리고는 열매를 맺을 미래를, 장을 담가 손주들 나눠주면 차 트렁크를 가득 채워줄 미래를. 생선을 사다가 손주들 배불리 먹일 미래를.


할머니 면회때 마다 가족들은 모두 가서 할머니에게 말을 건다. 휠체어에서 멍한 표정으로 우리가 누군지는 겨우 알아보고는 할머니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밥 차려놨다. 가서 밥먹자"

일년이 지나서야 이 말이 그리 서글프지가 않더라.

그저 할머니가 꿈꾸는 미래에서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쓸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생애 첫 집을 1층으로 구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