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연예인들의 차가 테러를 당했다.
보닛 위에 하얀색 래커로 숫자 10을 커다랗게 그려놨는데, 누가 어떻게 한 짓인지 밝혀낼 수가 없었다. CCTV를 뒤져봐도 범인을 찾을 수 없었고, 목격자를 찾으려 해도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사건을 제대로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연예인들의 최고급 차량만 노린 이 미스터리한 사건은 단숨에 화제가 되었다. 어느 예능인은 일부러 숫자를 지우지 않았다. 화제에 편승해 주목받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 때, 더 신기한 소식이 전해졌다.
“숫자가 9로 바뀌었습니다!”
10이었던 숫자가 9로 바뀌었다는 이야기. 역시, 이번에도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다음 달에는 8로 바뀌더니, 그다음 달에는 7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놀랍게도, 24시간 촬영 결과 숫자는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저절로 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카운트다운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요?”
주차장에서 테러를 당했던 차량 중 숫자를 지우지 않은 차는 총 세 대. 그 세 대는 방송국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흥미로운 방송거리가 되어주었다. 방송국은 과학자들이나 무속인들을 섭외해 차 앞에서 이 신기한 현상에 대해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중간에 관심이 좀 시들해지기도 했지만, 숫자가 1이 되었을 때는 또다시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드디어 숫자가 0이 되기 전날. 방송국은 그 차 세 대를 모아놓고 생방송을 진행했다.
[이제 조금 뒤면 숫자가 0으로 바뀔 텐데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동안의 추리를 종합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먼저,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대폭발이 일어날 것이란 의견이 많았는데요. 그래서 저희는 스튜디오에 만반의 준비를 해뒀습니다. 숫자가 0이 되었다가 다시 -1, -2로 계속 이어질 거란 허무한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과연? 또 로봇으로 변신할 거란 이야기도 참 많았습니다. <트랜스포머>란 말이죠, 하하. 그리고 다른 의견으로는…]
지난 10개월 동안 한 번이라도 이 카운트다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 TV 앞에 모여들었다. 과연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드디어 숫자 1이 0으로 변하는 그 순간,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응애~”
[헐?]
세 대의 차가 갓난아기 셋으로 변해버렸다.
[이, 이게 무슨? 아기? 아기입니다! 잠, 잠깐! 빨리 가봐! 빨리 스튜디오로!]
자동차가 아기로 변하다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갓난아기들은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방송국은 검진 결과를 속보를 내보냈다.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인간, 인간 아기입니다!]
모두가 황당해했지만, 그중에서도 차 주인들이 가장 황당해했다. 졸지에 아기 보호자가 되게 생긴 것 아닌가?
반면 방송국은 신이 났다. 연일 특종이었다. 당장 차 주인들과 아기의 유전자 검사를 시도했고, 차 주인 중 한 명인 유명 예능인의 기자회견을 방송하기도 했다.
[저 아이는 제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하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제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누구와도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았지만, 차 주인이었던 연예인들 모두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결정을 지지했다. 한데, 또 놀라운 뉴스가 들려왔다.
[어제 오후 8시경, 영동대교를 지나던 차량 중 일부에 또다시 아기 카운트다운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10의 등장입니다!]
이번엔 다리를 지나던 대략 30대 정도의 일반인들 차량에 숫자 10이 생겼다.
“뭐야, 그럼 이번에도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아기가 되는 거야?”
전국적인 관심이 그들에게 쏠렸다. 취재진이 주차된 차들을 찍어 가거나, 차주를 인터뷰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라 붙었다. 그런데 용기를 낸 누군가 자신의 차에 적힌 숫자를 지워버렸다.
“전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전국적으로 수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뭐야? 숫자를 왜 지워? 그럼 안 되지! 아기는 어떡하고?”
“흠. 열 달 뒤에 아기가 되는 거면, 차도 생명으로 볼 수 있는 건가?”
“야, 타고 다니는 걸 생명이라고 볼 수 있냐? 주유소 가서 기름 넣고, 배기가스를 뿜는 생명도 있냐?”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라잖아! TV에 나온 그 애기들 셋이 얼마나 귀여운지 못 봤어?”
나머지 차주들은 숫자를 지우는 일에 무척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택시 기사 한 명이 뒤이어 숫자를 지워버렸고, 몇몇 사람들도 숫자를 지웠다. 그럴 때마다 방송국은 그들을 찾아갔다. 대부분은 카메라를 회피했지만, 강인한 인상의 택시기사는 당당하게 방송에 나섰다.
“그냥 내 차에 낙서가 생겨서 지운 것뿐인데 뭐가 어때서 그래? 생명은 무슨. 이건 그냥 택시야, 택시! 그럼 나보고 열 달을 기다려서 그 아기를 키우란 말이야? 내 나이가 환갑인데 무슨 개소리를! 게다가 내 택시는 어쩌고? 이게 내 전 재산인데! 당신들이 보상해줄 거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윤리적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당장 무생물인 자동차에 생명 운운하기가 애매했다. 하지만 몇 달 뒤 차가 아기로 변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기가 세상에 나올 기회를 없애버린 거잖아! 숫자를 지우는 게 살인이지 뭐야!”
“그놈의 돈! 돈! 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누구는 불임으로 죽을 것 같은데 말이야, 진짜!”
‘숫자를 지우는 건 살인이다’라는 여론과 ‘자동차의 낙서를 지우는 게 왜 살인이냐’라는 여론이 충돌했다. 뭐라 말하기에 워낙 애매한 사건이라, 각계의 전문가들도 입장 표명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던 중에 가장 합리적인 의견이 제시되었다.
[개인이 책임지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처리합시다. 그들에게 똑같은 차를 지급해주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차량은 정부가 관리합시다.]
“그러면 되겠네!”
“좋은 생각이네!”
“그래, 그거 좋다!”
가장 합당해 보이는 의견이었다. 한데,
[긴급 속보입니다! 또다시 아기 카운트다운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차가 아니라, 건물입니다!]
강남 중심가의 빌딩들 벽면에 숫자 1 0이 커다랗게 생겨났다.
“설마 저 건물이 아기가 되는 거야?”
빌딩이라니. 이건 더더욱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수백 억짜리 건물이 열 달 뒤엔 아기가 된다니!
“그럼 이것도 정부에서 금액을 보상해주고 아기로 변하게 놔둬야 하는 거야? 저 수십 채의 강남 빌딩을?”
차의 경우와는 달랐다. 이 경우에는 숫자를 지우는 게 옳다는 의견이 많았다. 바로 카운트다운을 지우는 빌딩이 나타나도 비난의 수위는 약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차랑 건물이랑 뭐가 다른 거야? 차는 숫자를 유지해야 하고, 건물은 지워야 한다고? 그건 결국 생명에 값을 매기겠다는 말 아니야?”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이런 극단적인 논리가 아니라, 유연한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튼, 이 일을 기점으로 어느 시민 단체의 시위가 시작됐다.
“자동차가 아닙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소중한 생명입니다!”
“숫자를 지우는 건 갓난아기를 죽이는 살인입니다!”
그들의 시위는 한순간에 집중 조명을 받게 되었는데, 시위 도중에 일어난 기막힌 사건 때문이었다.
[긴급 속보입니다! 아기 카운트다운 문제로 시위 중이던 사람들의 스마트폰에 숫자가 생겨났습니다! 최소 50대의 스마트폰에 숫자가 생긴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시위에 나선 사람들은 옳다구나, 스마트폰의 숫자 10을 들어 보이며 주장했다.
“저희는 절대 이 숫자를 지우지 않을 겁니다! 이 생명을 열 달간 지킬 겁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가 뭐겠습니까? 저희 주장이 옳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주목받는 데 성공한 그들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졌다. 규모가 커진 시위대는 아직 숫자를 지우지 않은 강남 건물 앞에서 시위하거나, 차들을 쫓아다니며 숫자를 지우지 못하게 막았다. 몰래 숫자를 지운 차에 테러를 가하기도 했고, 행여나 숫자를 지우려는 시도만 해도 엄청난 비난을 쏟아부었다.
“이 살인자야! 숫자를 지우는 건 갓난아기를 죽이는 거라고!”
“어떻게 생명보다 차를 우선할 수가 있지? 인격적으로 문제 있는 것 아니에요?”
숫자 주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숫자를 지우자니 엄청난 비난을 받을까 봐 겁났고, 안 지우자니 피해가 너무 컸다. 정부가 명확한 구제책이라도 내놓으면 좋으련만, 당장은 어떠한 대책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분위기는 점점 숫자를 지우지 말아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강남의 어떤 건물주는 건물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숫자를 지우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환호를 들었고, 어느 부자는 숫자가 생긴 차 세 대를 자비로 매입하며 박수를 받았다. 첫 사건 때 아기를 입양한 연예인이 시위 현장에 나와서 사람들을 독려하기도 했고, 아기와 함께 방송 출연을 하여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 달 뒤. 이제는 숫자를 지우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기계와 건물일지라도 열 달 뒤에는 갓난아기니까 생명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긴급 속보입니다! 성수사거리 근방을 지나던 차량 10여 대에 아기 카운트다운이 생겼습니다!]
“숫자를 지우는 건 살인이다!”
하지만.
[속보입니다! 여의도의 빌딩들에 아기 카운트다운이 생겼습니다!]
“숫자를 지우는 건 살인이다!”
하지만.
[긴급, 긴급 속보입니다! 전국 곳곳에서 아기 카운트다운이 동시 다발적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벌써 수천 건이 보고되었는데요. 그 대상도 너무 다양합니다! 의자, 노트북, 숟가락, 리모컨, 책장, 냉장고…]
“…”
전국적으로 수백만 건의 아기 카운트다운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위대는 조용히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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