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살 모태솔로 홍혜화. 그녀는 이번 소개팅에 사활을 걸었다.
왜 그동안 소개팅에 실패했는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여중, 여고, 여대에 직장까지 여자뿐인 직장을 다니며 남자 경험이 모자랐던 그녀는, 소개팅만 나가면 쫄보가 되곤 했다.
이번만은 달라야 했다. 이번 소개팅마저 실패하면 그녀의 인생에 더 이상 남자는 없을 것이라 각오했다. 다행히 소개팅남과의 카톡 대화도 좋았고, 사진도 교환하여 서로 호감을 확인했다. 이미 그녀는 소개팅남과의 노후 계획까지 짜놓은 상황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지금 홍혜화가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내 남자의 두 얼굴! 데이트 폭력!]
“으…”
남자를 모르는 홍혜화는 사실, 남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 같은 게 있었다. 물론 반대로, 남자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 주말이면 만나게 될 소개팅남, 김남우 말이다.
홍혜화는 김남우의 사진과 카톡 대화들을 보면서 김남우를 궁금해했다. 턱선이 살아 있는 얼굴형은 남자다운 인상이었고, 일자로 다문 입술과 깊은 눈매는 진중한 느낌을 주었다. 카톡 대화도 단답형이 많아, 어딘가 좀 과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람은 알 수 없으니까.
“그래, 괜찮은 사람일 거야. 이모가 아무나 소개해줬겠어?”
홍혜화는 애써 고개를 끄덕거리며 끔찍한 TV 채널을 돌려버렸다. 한데,
[평범한 줄만 알았던 남편이, 사실은 살인범? 두 얼굴의 남편!]
“이건 또 뭐야!”
울상이 된 홍혜화는 TV를 꺼버리고 외투를 챙겨 입었다. 단 게 땡겼다. 바람도 쐴 겸, 동네 편의점이나 갔다 오기로 했다. 홍혜화는 길을 걸으면서도 온통 소개팅 생각에 빠져 땅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쑥 전단지를 든 손이 튀어나왔다.
“엇!”
깔끔한 양복 차림의 사내가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살짝 놀란 홍혜화는 얼떨결에 전단지를 받아 들었다. 전단지에는 귀여운 악마 캐릭터와 함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16가지 이야기! 제대로 알려드립니다!]
홍혜화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우리 고객님, 궁금한 사람이 있으시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걱정되시죠? 알고 싶으시죠? 그 궁금증을 채워드립니다! 만족도 높은 서비스!”
마치 홈쇼핑 판매자처럼 주절대는 사내의 모습에 홍혜화는 경계했다. 옆으로 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됐어요!”
“언제라도 찾아주세요!”
사내의 목소리를 등 뒤로 하고, 홍혜화는 별꼴을 다 본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편의점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며 전단지를 보다가,
“어? 편의점 2층이잖아?”
약도의 위치가 편의점 2층을 나타내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곳일까?’하는 호기심에 간판이라도 볼 생각으로 편의점 앞에 도착한 홍혜화.
“응?”
2층엔 간판 대신, 추억의 16색 크레파스가 그려져 있었다.
“와! 저거 국민학교 때 진짜 갖고 싶었던 건데!”
옛 추억이 떠오른 홍혜화는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하얀색 철문에 노크하자,
[열려 있습니다. 들어오시죠!]
어딘가 목소리가 낯익다 생각하며 들어선 홍혜화.
“엇!”
아까 길에서 만난 양복 차림의 그 사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환영하며 자리를 권했다.
“어서 오세요! 이리로.”
‘어떻게 나보다 먼저 여기 온 거지?’
홍혜화는 찜찜함에 눈썹을 찌푸리며 사내 앞에 앉았다. 사내는 책상 위에 양팔을 괸 채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궁금하신 분이 계신 거죠?”
홍혜화는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여기 혹시 흥신소 같은 곳이에요?”
사내는 싱긋 웃으며, 책상 서랍에서 그것을 꺼냈다.
“앗!”
낡은 16색 크레파스. 홍혜화가 국민학교 시절에 봤던 그 옛날 그대로의 크레파스였다. 사내는 크레파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 가지 색깔당 하나의 정보를 알려줄 겁니다.”
홍혜화는 뜬금없는 이야기라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사내는 대답 없이 옛날 스케치북을 꺼내서 홍혜화의 앞에 펼쳐놓았다.
“처음 한 번은 공짜로 해드리죠. 그분을 생각하면서, 원하시는 색깔을 집어보세요.”
홍혜화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지만, 사내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찜찜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분홍색 크레파스를 집어 드는 홍혜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떴다.
“어? 어어어어!”
크레파스를 든 홍혜화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스케치북 위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김남우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동네 여탕을 훔쳐보려다 걸려서 벌을 받은 적이 있다.]
홍혜화는 이 신비한 현상에 경악해 입을 벌린 채 사내를 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뭐예요, 이게?”
“음… 그냥 간단하게 마법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떠실지. 혹은, 초능력? 외계인의 기술? 악마와의 거래? 하하.”
홍혜화는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가 말한 것들이 아니라면 저절로 움직인 자신의 손이 설명되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바라보는 홍혜화.
“그럼, 이 내용이 진짜예요? 여탕을 훔쳐보다 걸렸다고?”
“예, 실제죠. 이 16색이 모두, 실제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홍혜화는 김남우에 대해 살짝 실망했다. 여탕을 훔쳐보려다 걸렸다니. 홍혜화가 가지고 있던 남자에 대한 환상에 위반되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뭐… 어렸을 때니까…”
애써 고개를 끄덕인 홍혜화의 시선이 곧장 남은 15색 크레파스로 향했다. 시선을 확인한 사내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부터는 요금이 붙습니다.”
“…얼만데요?”
“천 원!”
“천 원이요?”
너무 싼 가격에 얼굴이 밝아지는 홍혜화.
“천원부터 시작해서 두 배씩 올라갑니다.”
“천원부터 두 배씩…”
홍혜화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지만, 천원부터 두 배씩이라 해봐야 큰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소개팅에 나가서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자신이 없었던 홍혜화에게는, 꼭 필요한 크레파스였다.
“살게요!”
“선불입니다!”
홍혜화는 얼른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 하나를 꺼내줬다. 그리고 15색의 크레파스 중에 파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우아!”
역시나 저절로 움직이는 손. 눈이 커진 홍혜화가 자신의 손을 신기하게 보았다.
[김남우는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여자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보았지만, 수영을 못해서 뛰어들지 않고 다른 사람이 구하는 걸 지켜만 보았다.]
“뭐야?”
홍혜화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단순히 생각하면 수영을 못한다는 정보겠지만,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
“음… 혹시 내가 물에 빠져도 뛰어들진 않을 거란 건가?”
홍혜화는 잠시 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지갑에서 2천 원을 꺼내어 사내에게 건넸다.
“음…”
크레파스들을 보며 고민하다 빨간색 크레파스를 집어 드는 홍혜화.
“우아!”
여전히 놀랍게 움직이는 홍혜화의 손이 쓴 문구는,
[김남우가 28살에 만났던 여자친구는 살해당해 죽었다.]
“살해?”
홍혜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뭐, 뭐예요? 이 남자가 죽인 거예요?”
“그야 모르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냥 살해당해 죽었다는 것뿐입니다.”
“네? 아니, 그럼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예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없습니다. 이 크레파스는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상관없이 알려줍니다. 뭐 어쩌면, 빨간색이 가진 뉘앙스가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피 색이잖습니까? 하하.”
“으…”
홍혜화의 얼굴이 찜찜해졌다. 하나라도 다른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어졌다.
4천 원을 건네고, 노란색 크레파스를 집어든 홍혜화.
[김남우는 계란 노른자를 싫어한다.]
“엥? 이게 뭐야!”
황당해하는 홍혜화의 얼굴을 본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사소한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상관없이 알려준다고요. 그래도, 혹시 그분과 찜질방에서 계란 먹을 땐 노른자를 독차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홍혜화는 어이가 없어 사내를 노려보다가, 그냥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서 건넸다. 녹색 크레파스를 집어든 홍혜화.
[김남우는 주식이 올라, 900%의 수익을 냈었다.]
“900%!”
홍혜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홍혜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게 자신의 돈도 아니었지만, 얼굴이 상기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세를 몰아, 급히 만 육천 원을 사내에게 건네고 황금색 크레파스를 집어 드는 홍혜화.
“흐흐.”
기대하며 스케치북 위로 움직이는 손을 보았다.
[김남우의 신용도는 항상 최상급이고, 빚을 진 적도 없고, 보증을 선 적도 없다.]
“오! 경제관이 훌륭한 사람이네!”
더 밝아지는 홍혜화의 얼굴. 기뻐하며 다시 지갑을 열다가, 멈칫했다.
“음… 3만 2천 원이에요?”
“그렇습니다.”
가격이 살짝 부담되었다. 잠깐 고민했지만,
“에이! 화장품 한 번 덜 사면 되지!”
돈을 내고 주황색 크레파스를 집어든 홍혜화.
[김남우는 운전 중에 사람을 친 적이 있다.]
“헉!”
좋지 않은 내용에 홍혜화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씨, 뭐야! 사람을 쳤다고? 아씨, 찜찜한데…”
홍혜화가 지금 찜찜한 건, 가벼운 접촉 사고인지, 큰 사고인지, 누구의 과실인지조차 안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짜증나!”
알 수 없는 거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만약 누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복잡한 생각으로 입술을 깨물던 홍혜화의 시선이 남은 크레파스로 향했다. 이 남자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남은 색은 9개. 마음 같아선 다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가격이 부담되었다. 다시 또 계란 노른자 같은 사소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정말 짜증 날 것 같았다.
“그만하시렵니까?”
“아, 몰라 몰라! 한 번만 더!”
지갑을 뒤지던 홍혜화는 6만 4천 원을 카드로 결제했다.
“무슨… 이런 곳에 카드기가 있어요?”
“전단지 못 보셨습니까? 정식 사업장입니다.”
하늘색 크레파스를 집어 든 홍혜화.
[김남우는 연애 중에 다른 여자에게 한눈판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호! 바람은 안 피우는구나!”
홍혜화의 얼굴이 환해졌다. 김남우와 만나면 적어도 여자 문제로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6만 4천 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정보였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홍혜화.
“그래도 마지막이 잘 나와서 다행이네요!”
홍혜화는 싱글벙글 가방을 정리하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한데, 남은 8색의 크레파스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홍혜화 혼자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나만 더 볼까… 아씨, 궁금해 죽겠네…”
긴 시간 갈등하던 홍혜화는 결국,
“에잇! 하나만 더 보죠!”
12만 8천 원이 결제되는 순간이었다. 살구색 크레파스를 집어든 홍혜화.
[김남우는 현재, 일주일 평균 3번의 야동을 본다.]
“으악!”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홍혜화는 울상이 되어 짜증을 냈다.
“이게 뭐야!”
“하하! 건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뭐라구요!”
괜히 나섰다가 매서운 눈초리를 받은 사내는 찔끔했다. 홍혜화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안 하고 가십니까?”
“예! 너무 비싸잖아요!”
“그런가요? 하하.”
홍혜화는 사내가 말하는 게 왠지 얄미워 그를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한데,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며 고민하다가 결국, 홱 뒤돌았다.
“아씨! 할부 돼요?”
“물론입니다! 무이자 36개월까지 가능합니다.”
카드를 긁은 홍혜화는, 25만 6천 원짜리 갈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김남우는 어릴 적 개에게 물린 적이 있어, 개를 싫어한다.]
“개를 싫어한다고?”
홍혜화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집에서 8년째 키우고 있는 강아지가 있는 홍혜화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지금이야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거니까, 결혼한다면 독립해서 살긴 하겠지만… 그래도 개를 좋아하는 홍혜화와는 맞지 않았다.
“아, 이런 취향 차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
“하하하. 돈값 하는 이야기였습니까?”
사내는 웃으며 물었지만, 홍혜화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무 비싸요!”
“그런가요? 하하.”
비싸다고 하면서도, 홍혜화의 시선은 남은 크레파스들을 보고 있었다.
“저 중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저야 모르죠.”
“휴… ”
한숨을 쉰 홍혜화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중얼거렸다.
“36개월 할부가 되면 한 달에… 에잇! 하나 더 살래요!”
“훌륭하십니다!”
하얀색 크레파스를 집어든 홍혜화.
[김남우라는 이름은 사실, 신분이 세탁된 이름이다.]
“뭐야?”
뜨악해서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나는 홍혜화.
“신분세탁? 신분세탁이라고? 뭐야, 이 남자!”
다시 털썩 주저앉으며,
“이게 뭐야! 신분세탁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의자에서 몸부림치며 짜증내는 홍혜화에게, 사내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말을 했다.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안 만나면 되잖습니까? 하하.”
홍혜화는 흉악한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다 몸부림쳤다.
“이번 소개팅마저 날릴 순 없다고요! 모쏠로 늙어 죽긴 싫단 말예요!”
의자 뒤로 넘어갈 것처럼 몸부림치던 홍혜화는, 벌떡 고개를 세워 사내에게 물었다.
“신분세탁한다고 다 나쁜 사람은 아니죠?”
“글쎄요. 그야 모르죠?”
“어떤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인상을 찡그리던 홍혜화는,
“하나 더 봐야겠어요!”
“훌륭한 판단입니다.”
1,024,000원짜리 검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김남우는 탈모로 인해 부분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뭐? 대, 대머리? 대머리야? 대머리였어?”
홍혜화는 울상이 되어 완전히 의자에 널브러졌다.
“부분 가발이니까, 심한 대머리는 아닐 겁니다.”
“그거나 그거나!”
홍혜화는 너무 억울해서 사내에게 소리쳤다.
“이렇게 비싸게 주고 샀는데 이게 뭐예요? 대머리라는 거나 알려주고! 뭐야, 이게 진짜!!”
“흠…”
생각하던 표정의 사내는, 연두색 크레파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크레파스엔 고객님이 마음에 들어 할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팔아먹으려는 수작 아니에요?”
“하하하. 적어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인 건 확실합니다.”
홍혜화는 갈등했다. 사실 이대로라면, 주말에 소개팅에 나가더라도 김남우라는 사람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취소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있었다. 한데 저 연두색 크레파스에서 나올 내용이 괜찮다고? 무슨 내용일까? 뭐가 나올까?
“으… 이백만 원… 36개월 할부면…”
입술을 깨물며 갈등했다. 금액이 너무 컸지만, 궁금한 마음도 컸다.
갈등하고 갈등하다, 끝내 홍혜화는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아씨! 긁어요!”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카드를 건네고, 연두색 크레파스를 집어든 홍혜화.
[김남우는 결혼하고 아내와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해 따로 저축하는 통장이 있다.]
“세계여행!”
홍혜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렸을 적부터 홍혜화의 꿈이 바로 세계여행이었다.
“와! 나중에 아내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돈을 따로 모으고 있단 말야? 멋진 남자잖아!”
“만족하십니까?”
“음…”
홍혜화는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를 몰랐으면 후회할 뻔했다고 생각했다. 김남우에 대한 호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홍혜화. 사내는 이때다 싶어,
“그럼, 혹시 다른 크레파스들도?”
“됐어요!”
그건 정말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홍혜화. 사내는 피식 웃었다. 홍혜화는 나간 돈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크레파스들이 눈에 밟히기도 했다. 그 시선에 사내가 반응해서,
“오, 한 번 더?”
“됐다니까요!”
홍혜화는 질색을 하며 물러났다.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역시, 사람의 호기심은 무섭죠?”
“…어휴.”
말을 말자며 고개를 흔든 홍혜화는, 푹푹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더 있다간 또 무슨 짓을 할지… 수고하세요!”
“하하하.”
사내는 스케치북을 건네며 홍혜화를 배웅했다.
홍혜화는 가게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딴 세상에서 빠져나온 느낌이 들어, 스스로 머리를 때렸다.
“멍청이! 얼마를 쓴 거야 도대체? 아이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손에 든 스케치북의 글들이었다.
“그래! 이런 정보들을 얻은 게 어디야? 꽤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해! 돈이 아까워서라도, 이 남자랑 결혼까지 하면 되지 뭐!”
홍혜화는 잘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잘한 일 같았다.
“하나만 더 사볼 걸 그랬나?”
남은 3가지 색의 크레파스가 궁금해졌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
.
.
커피숍에 마주 앉은 홍혜화와 김남우.
홍혜화는 지금, 극심한 분노로 인해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홍혜화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김남우가…
김남우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일 줄이야!
“아참! 이 얘기도 재밌는데,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여탕을 훔쳐보다가 걸려가지고… 으하하하!”
“…”
“아참참! 제 이름이 사실, 작년에 바뀐 이름이거든요? 일종의 신분세탁이랄까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간첩신고를… 제가 또 개를 싫어해요! 어렸을 때… 사실 저는 통장을 하나 따로 만든 게 있는데… 혹시 주식 하시나? 전 사실 주식 같은 거 안 하는데, 친구 놈이 글쎄 10만 원만 해보라기에… 혹시, 계란 노른자 좋아하세요?”
“…”
“그리고 이건 정말 비밀인데… 특별히 홍혜화 씨에게만 말해드리는 겁니다! 여기 이 부분이… 사실 가발입니다! 짜잔! 으하하하! 아참, 그리고 제가…”
부들부들 떨던 홍혜화는 속으로 절규했다.
‘그만 말해! 그만 말하라고! 으악, 내 돈!’
같은 시간, 편의점 2층. 열심히 이삿짐을 싸고 있는 사내가 귀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직접 만나는 게 확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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