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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식 Apr 04. 2018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만 하느라 아내에게 신경 쓰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아내보다는 회사가 더 중요했다. 그렇다고 아내의 교통사고가 내 탓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모를 죄책감이 조금은 있었나 보다.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언젠가 한번, 아내가 보육원에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아내가 죽고 나서 그 보육원을 찾은 이유도 아마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 실은, 깜짝 놀랐다. 회사 일에 전념해야 할 때, 내가 이런 시간 낭비를 하다니.


내가 내 정신을 온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회사 일에 전념하려면 이런 작은 죄책감 같은 건 어떻게든 털어버리는 편이 안전했다.

보육원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건물 뒤편에 있던 사랑의 틈이라는 익명의 기부 창구를 발견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기부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기부하는 사람들이야 자기만족으로 하는 거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해보기로 했다. 아내가 생전에 자주 봉사하던 보육원에 기부라도 좀 하면 낫겠지. 그 정도면 아내에게 도리는 하는 거다.


일부러 은행까지 다녀와서 100만 원을 기부했다. 딱히 마음이 편해진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제 다시 회사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한데 뜻밖에도, 다음 날 회사로 그들이 찾아왔다. 보육원의 대표는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원래 저희는 이렇게 찾아오거나 연락을 드리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익명으로 기부가 이뤄지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도저히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어서, CCTV를 뒤져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아.”


기부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일에 전념해야 하는데…

한데, 그의 다음 말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자그마치 5억 원이나 기부해주신 분을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만.”

“네?”


5억 원이라고? 이게 무슨? 당황한 나는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기부를 하고 나오는 길에 마주쳤던 허름한 복장의 할아버지, 그 노인이었구나! 그 검은 봉지에 현금 5억 원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세상에.

이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줄근한 노인이 5억 원을 기부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CCTV만 보고서 내가 기부한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다. 하긴, 나도 그 검은 봉지에 5억 원이나 들어 있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으니.


“익명으로 기부하신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솔직히 이런 좋은 일은 크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 아는 기자분도 있고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보육원 대표의 말을 듣는 동안,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허름한 복장의 노인은 부자가 아닐 게 분명했다. 아마 평생 모은 재산을 죽기 직전에 기부하는 것일 테지. 그 큰돈을 익명으로 기부했다는 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고. 가만, 혹시 내가 이걸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회사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광고 효과가 엄청날 텐데!


“…”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부끄럽지만, 제가 기부를 하긴 했습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셨는데 잡아떼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보육원에 초청도 하고, 기사도 내도 괜찮다는 말씀이시죠?”

“예, 물론이지요.”


나는 빙긋 웃었고,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보육원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 바로 기사를 냈다. 현수막도 내건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다! 들키면 어떡하지? 그 노인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면 어쩌지?

끔찍하다. 보통 끔찍한 게 아니다. 게다가 나는 아내를 팔기까지 하지 않았나? 죽은 아내가 전념하던 보육원에 사기를 친 남편 이야기는 훈훈한 기사보다 훨씬 더 잘 팔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노인이 나타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나는 제발 그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서 오늘내일하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빌어먹을!

초청을 받아 보육원에 가는 길에 우연히 붕어빵 노점을 본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 할아버지였다. 그 노인이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아프긴커녕, 너무나 쌩쌩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알고 있을까? 기사를 보았을까? 보육원에 가봤을까?

다행히, 보육원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5억 영웅이었고, 행사 내내 감사 인사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가는 길에도 얼마나 융숭한 배웅을 하던지. 하지만 나는 곧장 집으로 가지 못했다. 바로 붕어빵 노점으로 가서 노인을 지켜봐야 했다.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빌어먹을! 기부 같은 허튼짓을 왜 했을까! 아내를 향한 죄책감은 개뿔.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붕어빵 파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저 노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진실을 밝혀선 안 된다.


.

.

.


지난 며칠간 전전긍긍했다. 거의 매일같이 노인을 찾아가 감시했다. 안 그러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매일 찾아가 노인이 일하는 모습을 온종일 감시하고, 또 노인의 집까지 미행했다. 그 집의 불이 꺼진 뒤에야 나도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기부를 한 뒤로, 단 하루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있지도 않은 죄책감을 털어보려고 허튼짓을 했다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답지 않은 실수다. 나에게 이럴 시간은 없다. 어서 회사 일에 전념해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노인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만약 노인이 알게 된다면… 나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장면들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사실을 안 노인이 괘씸하다며 전면에 나서서 자신의 기부를 증명한다.

사실을 알았다 해도, 노인은 이미 그런 데에 미련이 없어서 끝까지 익명을 지킨다.

노인이 나섰지만, 후줄근한 노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언젠가 노인의 수명이 다해서 사실을 밝힐 수 없게 된다.


억지로 좋은 상황을 떠올려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렇게 계속 회사 일을 내팽개치고 있을 순 없으니,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였다.


노인에게 가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무릎 꿇어 부탁하는 방법.

노인이 사실을 고백했을 때, 끝까지 내가 기부한 거라고 우기며 노인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방법.

그리고… 내 손으로 노인의 수명을 앞당기는 방법.


셋 중 하나를 실행해야만 했다. 아니, 둘 중 하나. 끝까지 내가 기부한 거라고 우기는 방법은 들킬 확률이 너무 높다. 둘 중 하나를 실행해야만 했다.


“…”


아니다. 노인한테 솔직히 고백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저 노인이 미쳤다고 ‘그럼 자네가 기부한 것으로 하게’라고 말할까. 그건 내 바람일 뿐이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지금 내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

.

.


결정을 내렸다. 나는 단단히 각오했다. 이 길이 최선이었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네? 선생님?”


내 선택은 바로 이것이었다.


“죄송합니다. 5억 원을 기부한 건, 제가 아닙니다.”


보육원에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저는 100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저를 5억 원 기부자로 착각하시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습니다. 제가 기부한 건 100만 원입니다.”

“…”


내 고백을 들은 보육원 대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게 이어질 비난과 멸시, 욕을 기다렸다.

그러나 보육원 대표는 달래듯이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지금 혹시 돈을 되돌려달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기부한 돈은 100만 원입니다. 5억 원 기부자는 따로 있습니다. 근처에서 붕어빵을 파는 노인입니다.”

“허허, 참.”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보육원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얼마 후, 그는 나를 CCTV 영상을 볼 수 있는 관리실로 불렀다.


“이걸 좀 보시죠. 그날 CCTV 영상입니다.”


CCTV는 보육원 앞길이 아닌, 뒤편 사랑의 틈을 선명하게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돈다발을 끊임없이 밀어 넣고 있는 내 모습이.


“이렇게 선생님께서 직접 5억 원을 넣어주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아내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아내에게 미안하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나는 아내를 정말 사랑했구나.

궁금하다. 그동안 번 모든 돈을 아내를 위해 바친다 해서 이제 와 아내가 기뻐할까? 아내가 날 용서해줄까?


미안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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