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식 Mar 28. 2018

노인의 손바닥 안에서


찾아가기 어려울 만큼 외진 곳에 있었던 그 칵테일바에는, 숨겨진 입장 조건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4월 1일에 태어난 20대이거나, 재산이 200억 이상이어야 했다.


대개는 손님이 없었지만, 오늘은 웬일로 두 명의 손님이 있었다.

괴로운 얼굴로 술을 마시는 청년. 그리고 그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60대 노인.


청년의 얼굴에 술기운이 올라오자, 때가 되었다고 느낀 노인이 자연스럽게 청년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자네 생일이 4월 1일인가?”

“네? 아니, 그걸 어떻게…”

  

청년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노인은 피식 웃으며 농을 던졌다.    

 

“그냥 찍어봤네. 얼굴에 4월 1일생이라고 쓰여 있길래 말이야.”

“네?”

“근데 자네, 무슨 고민이 있는가 보군?”

“아…”     


청년은 잠깐 뜸을 들이다,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이제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저는 인생 실패자입니다.”

“흐음.”     


한 차례 턱을 쓰다듬은 노인이 바텐더를 향해 손짓하자 청년의 빈 술잔이 채워졌고, 그 술 한 잔에 청년의 입도 터졌다.     


“오늘 대학 동창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신혼집은 새 아파트라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제 처지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나이 먹도록 입에 풀칠할 만한 기술도 없고, 취직도 못 했고, 당연히 모아둔 돈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게임뿐입니다. 남들처럼 부모 잘 만나서 편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좋은 길로 끌어줄 인맥도 없어요. 외모나 말발이라도 좋으면 몰라, 정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답이 안 나오는 인생 실패자죠.”

“흠.”     


청년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말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니. 자네에겐 젊음이 있지 않은가?”

“젊음이요? 하하.”     


청년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젊음이 뭐 밥 먹여주나요? 젊다고 돈이 나옵니까, 뭐가 나옵니까?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젊음!”

“흠. 글쎄?”     


노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을 한 모금 홀짝인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가 자네라면 그렇게 살지 않을 걸세.”

“예?”

“내가 만약 오늘 자네처럼 그런 자극을 받았다면, 이렇게 혼자 술집이나 오는 짓은 하지 않았을 거란 말일세. 불쌍한 나를 위해 분위기 좋은 비싼 칵테일바에 들러 궁상을 떤다… 바보 같은 짓이지.”

“…”     


청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노인이 피식 웃었다.     


“한마디로 말해, 자네는 지금 젊음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일세. 왜? 기분 나쁜가?”

“…”

“자네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어제는 뭘 했는지 단번에 기억이 나긴 하나?”

“무슨…”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어제의 기억이 흐리지 않아. 이틀 전도, 사흘 전의 기억도 언제나 분명해. 무엇을 배웠는지, 나가서 뭘 했는지, 뭘 위해서 시간을 투자했는지 똑똑히 기억하지. 자네는 어떤가? TV나 보던 기억, 게임이나 하던 기억? 하하. 자넨 한 시간이 그냥 흘러도 아까운 줄을 모를 테지. 열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일 거고. 아까운 젊음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일세. 나였다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았어. 자네처럼 노력도 하지 않고 한탄만 한다고 인생이 달라지나?”

“아니, 지금 무슨!”     


발끈한 청년의 목소리가 커졌다.     


“ 저도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해도 안 되는 걸 어떡합니까?”    

 

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정말인가?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인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는 자네가 가진 젊음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 몰라. 자네의 한 시간은 내 하루보다도 가치가 있지. 난 자네가 참 부럽고, 또 안타깝네. 내가 만약 자네처럼 젊었다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뭐라고요? 이… 어휴.”     


화가 난 표정의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노인이 말했다.     


“내 나이는 66세, 재산은 200억이 넘네.”

“!”

“내가 만약 자네 나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수십 배는 더 성공할 자신이 있어. 알겠나? 젊음이란 그런 거야.”

“아,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돈이 많으니까 한가한 소리도 참 쉽게 나오네요!”     


청년은 노인을 무시하고 바텐더를 보았다. 계산을 하고 떠날 모양새였는데, 그런 그를 노인이 붙잡았다.     


“그럼 나와 바꾸지 않겠나?”

“뭘요?”     


노인은 청년의 손을 붙잡아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자네는 오늘 정말로 운이 좋네. 아무나 못 오는 이 술집을 찾아온 것만으로도 조상이 도왔다고 할 수 있지.”

“무슨…”     


억지로 의자에 앉혀진 청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바텐더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 칵테일바에서는 백혼주라는 걸 판다네.”

“백혼주?”

“두 사람이 계약을 하고 마시는 술이지. 그걸 마시면 두 사람의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네.”    

 

노인은 기대된다는 얼굴로 낮게 웃었고, 청년은 이해할 수 없어 인상만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어떤가? 나와 계약을 할 텐가? 자네의 그 실패한 인생을 나와 바꾸자는 말일세!”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청년이 짜증을 내려던 그때,     


탁!      


바텐더가 작은 술병 하나를 두 사람의 앞에 내려놓았다. 청년이 움찔 놀라 술병을 바라보고 있는데, 노인이 청년과 자신의 잔에 담긴 술을 바닥에 부으며 말했다.     


“나는 자네의 젊음을 가지고, 자네는 내 재산을 가지는 걸세. 200억이 넘는 내 재산을 말이야.”

“뭐라고요?”

“아까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젊음이라고. 그 쓸모없는 젊음을 내게 주게나.”

“…”     


청년은 심각한 얼굴로 바텐더와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이 사람들이 미친 건가 고민하는 표정이었지만, 노인은 진지했다.     


“만약 자네와 내가 계약하고 백혼주를 마시면, 우리의 인생이 바뀌게 되네. 자네는 66살의 성공한 자산가로 변하고, 나는 20대의 아무것도 없는 청년으로 변하겠지. 아주 자연스럽게, 마법처럼 말이야.”     


노인은 깨끗하게 비운 술잔 두 개를 바에 내려놓았다. 곧바로 바텐더가 잔에 백혼주를 따랐는데, 그걸 본 청년은 깜짝 놀랐다.     


“이, 이건?”     


분명 하나의 술병에서 나온 술인데, 각각 푸른빛과 붉은빛을 뿜어대는 게 아닌가? 한눈에 보아도 신비한 그 술의 빛에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데, 노인이 물었다.     


“어떤가? 나와 바꾸겠나?”

“…”     


침을 꿀꺽 삼킨 청년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말없이 청년의 대답을 기다리던 노인이 손으로 마른 입술을 문질렀다. 청년이 거절할까 봐 내심 불안한 모양새였다.

1분여를 고민하던 청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바꾸겠습니다! 예, 바꿀 겁니다.”     


노인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청년의 마음이 바뀔세라 급히 바텐더를 돌아보았다.     


“이봐, 바텐더! 우리 지금 계약하겠네! 증명을 해주게!”     


바텐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확인 신호로 알아들은 노인이 푸른 술잔을 들었다. 청년도 뒤따라 붉은 술잔을 들었다.     


“그럼, 동시에!”

“…”     


긴장된 얼굴의 두 사람이 백혼주를 입으로 가져가, 한 번에 들이켰다.

설명할 수 없는 맛에 인상을 찌푸린 둘이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아!”     


겉모습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청년은 점점 늙어갔고, 입고 있는 옷가지와 신발이 모두 명품으로 변했다.

노인은 점점 젊어졌고, 입고 있는 옷가지와 신발이 모두 평범한 것으로 변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으하하하하!”     


조금 전까지 노인이었던 청년이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의자에서 내려와 몇 번을 뛰어보다가, 조금 전까지 청년이었던 노인에게 말했다.     


“이보게! 좋은 거래였네! 나는 이만 가보겠네. 이 젊음이 너무 아까워서, 한시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     


남겨진 노인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텐더를 향해 몸을 돌렸다.     


“휴…”     


길게 한숨을 내뱉은 노인이 새로 술을 주문하며 빙긋 웃었다.     


“멍청한 양반 같으니. 한번 살아보라지. 어디 말처럼 쉬운가.”     


노인은 바텐더 앞에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어휴! 내가 여기서 몇 달을 죽치고 있었는지, 원!”

“하하.”

“이 양반 재산이 원래 내 재산보다는 적은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어영부영 서른 살이 되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내가 다시는 20대랑 인생을 바꾸나 봐! 정말 거지 같은 3년이었다고! 어휴, 안 되는 건 안 돼. 저 양반도 곧 현실을 깨닫게 되겠지.”     


노인은 느긋하게 웃으며 내내 그리워하던 안도감을 만끽했다. 밖으로 나간 그를 위해 혀를 쯧쯧 차면서 말이다.




*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김동식 작가의 글이 수록된 도서를 구입할 수 있는 서점으로 이동합니다.

http://www.yes24.com/24/goods/59481368?scode=032&OzSrank=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