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공간. 사람들이 잠든 어두운 밤의 그곳에 길고양이 몇이 모여 있었다.
그때, 밖을 보고 돌아온 하얀 고양이 하나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정말이네! 지금 죽음의 신이 동네 입구까지 와 있어!]
한쪽 귀가 잘린 고양이가 이제 알았냐는 듯이 말했다.
[나는 어제부터 알고 있었어. 죽음의 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지. 냄새나는 풀을 심은 파란 대문 집이야. 새벽쯤이면 도착할걸.]
뚱뚱한 검은 고양이가 그 집을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어린 인간이 셋이나 있는 집이지? 불쌍하다. 죽음의 신이 도착하면 그 집에 가족 다섯이 모두 죽을 거 아니야?]
귀 잘린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런 죽음의 신이니까.]
하얀 고양이가 깜짝 놀라 말했다.
[정말? 우리가 구해줄 수 없어?]
귀 잘린 고양이가 말했다.
[너는 어려서 생각이 단순하구나. 죽음의 신을 볼 수 있을 뿐인 우리가 무슨 수로 구할까? 구할 필요도 모르겠고.]
[아, 그래?]
하얀 고양이가 잔뜩 풀이 죽었을 때, 늙은 삼색 고양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는 너도 아직 어리구나. 죽음의 신이 검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걸 모르는구나. 검은 고양이가 있으면 죽음의 신의 발길을 조금이나마 옮길 수 있어.]
주변을 두리번거린 고양이들은 뚱뚱한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우리 중에도 검은 고양이가 하나 있네.]
늙은 삼색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고양이가 죽음의 신을 그 옆집으로 유인할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옆집에 사는 인간이 대신 죽는 거야. 내가 알기로 그 옆집에는 인간이 하나 밖에 살고 있지 않아.]
하얀 고양이가 제자리에서 폴짝거렸다.
[그러면 우리가 도와주자! 인간 하나를 희생해서 인간 다섯을 구할 수 있잖아!]
그러자, 이때까지 조용히 있던 치즈 색 고양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 옆집에 사는 건 캣맘이라고 불리는 착한 인간이라고!]
귀 잘린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캣맘이 그 집이었지. 그 인간이 죽어버리면 거리에 식량이 줄어들 거야. 죽이면 안 돼.]
하얀 고양이는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래도 그냥 두면 어린 인간이 셋이나 죽잖아. 너무 불쌍해. 그들 다섯보다는 늙은 인간 하나가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난…]
귀 잘린 고양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이 하나 죽나 다섯 죽나 우리 고양이들한테 무슨 상관이야. 거리에 식량이 줄어들지 않는 게 더 중요해.]
치즈 색 고양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영문도 모르고 대신 죽으면, 캣맘이 너무 억울하잖아.]
하얀 고양이의 고개가 푹 수그러질 때 불쑥, 뚱뚱한 검은 고양이가 말했다.
[내가 죽음의 신을 옮길 수 있다고? 그럼 옮기는 것도 괜찮겠다. 하나보단 다섯을 살리는 게 더 낫지.]
치즈 색 고양이가 짜증냈다.
[무슨 소리야! 희생을 강요하면 안 된다니까!]
[그렇지만 하나보단 다섯이 더 소중하잖아?]
검은 고양이가 말하자마자, 하얀 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옆으로 다가와 섰다.
[맞아! 그 집에 어린 인간들이 셋이라니까? 구해주자!]
귀 잘린 고양이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하나 보다 다섯이 소중하다니, 단순한 생각이야. 캣맘이라는 인간은 거리에 식량을 늘린다고. 이 거리를 생각하면 그들 다섯보단 캣맘 하나가 더 가치 있어.]
치즈 색 고양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맞아. 다섯이고 하나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죽음의 신이 그들에게 방문하는 건 이미 정해진 운명이야. 현재 살 권리가 있는 건 캣맘뿐이라고. 그 권리를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순 없어.]
[하지만…]
치즈 색 고양이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은 두 고양이를 향해 다시 말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엔 살 권리가 있어. 살 권리에는 본인을 제외한 누구의 의도도 침범할 수 없어. 의도가 없는 자연과 상황만이 죽음을 만드는 거야. 의도가 없는 '죽음의 신'에 우리의 의도를 넣어선 안 돼.]
하얀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는 머리가 복잡했다.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그들이 무슨 말을 꺼내려던 그 순간,
탁!
근처 창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 고양이 새끼들이 왜 이렇게 울어싸!”
잠 못 이룬 인간의 물벼락에, 고양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무식한 놈의 고양이 새끼들! 아주 맨날 발정기지?”
‘탁!' 창문이 거칠게 닫혔다.
.
.
.
뚱뚱한 검은 고양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파란 대문 집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곧, 그 옆집으로 발길을 돌려 자리 잡았다.
[난 그냥 이 문 앞에서 쉬고 싶을 뿐이야. 의도는 없어.]
괜한 혼잣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고양이도 있었다. 근처 담벼락 위에 숨어 있는 하얀 고양이. 둘은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와버린 것이었다.
곧, 멀리서 죽음의 신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두 고양이는 긴장한 얼굴로 죽음의 신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한데,
죽음의 신은 검은 고양이를 무시하고 파란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어라?]
한껏 기다리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당황했다. 분명 죽음의 신은 검은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뚱뚱한 검은 고양이가 황당하게 일어설 때, 어느새 벽을 타고 내려온 하얀 고양이가 놀라 말했다.
[앗! 너 턱 밑에 하얀 반점 뭐야?]
[뭐?]
뚱뚱한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숙였지만 볼 수 없었다.
[나한테 그런 게 있었어?]
[이런! 영락없이 검은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하얀 고양이는 허탈하게 골목길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미안한 표정의 검은 고양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하얀 반점을 갖고 태어난 건 내 의도가 아니거든..]
두 고양이는 파란 대문 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김동식 작가의 글이 수록된 도서를 구입할 수 있는 서점으로 이동합니다.
http://www.yes24.com/24/goods/57799398?scode=032&OzSrank=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