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을 통한 고난주간 묵상(첫째날)
누가복음 23장 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의 용서에는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훗날 주님의 마음을 알아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듯, 언제고 우리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시는 주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갖고 돌아온 이에게 그 어떤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달려와 안아주시고 입맞춰 주시는 그 아버지의 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가상칠언을 통한 고난주간 묵상(둘째날)
누가복음 23장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어떤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는지, 또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 곁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과 비난을 받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상상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른 행악자를 향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항변하며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극한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이 아닌 잘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확정하고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가상칠언을 통한 고난주간 묵상(셋째날)
요한복음 19정 26~27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가나 혼인 잔치 부터 모든 것을 이루려는 십자가까지
어머니는 아들의 옆에서 그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아들을 따랐던 많이 이들이 등을 돌리고 제자들 마저도 도망쳤지만
어머니는 결코 아들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한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숭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 위, 고통과 죽음의 자리에 섰지만
그런 자신을 한 없이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의 손과 발에 박힌 못과 옆구리를 찌른 창 끝에서 전해지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모아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이 순간 어머니와 아들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결코 서로를 향한 사랑을 넘지 못합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또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믿음과 신뢰가 있기에…
또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알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들은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담담하게 나눕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서로 안에 담겨져 있는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상칠언을 통한 고난주간 묵상(넷째날)
마태복음 27장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는 기도를 하실 때만 해도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짊어지셔야 할 십자가의 무게가
감히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향해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실 때는
죽음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 가장 외롭고 고독한 그곳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이 외침은
예수님의 외침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난과 조롱을 받으시고 극한의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몸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예수님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가 가진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버림을 받았다’ 외칠 수밖에요.
하지만 예수님의 외침에는 신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옛날 구약의 때부터
약속하신 그 말씀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시22편)
죄 아래 살며 포기하듯 외치는 외침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외친 외침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영원한 단절과 영원한 생명이 다르듯 말이지요.
가상칠언을 통한 고난주간 묵상(성금요일)
“내가 목마르다”(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위에서 다 쏟아내시며 타는 목마름 가운데
그 갈증을 호소하지만, 우리는 그저 십자가 먼 발치에서 그 말라가는 입술을 바라만 봅니다.
안쓰러운 마음이야 더없이 크지만, 주님 달리신 십자가에 다가설 용기가 없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참혹한 고통 가운데 그 숨결이 점점 흐릿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버지 하나님의 숭고한 뜻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모두가 외면한 그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지만,
우리는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 몸을 숨기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척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시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셨던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물을 전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그 값으로 치루셨습니다.
받는 이들이 그 고마움을 깨닫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고독한 자리에서
너무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함으로
마지막 숨결을 세상에 흩으셨습니다.
어찌 그 고통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어찌 그 외로움을 헤아릴 수 있을까.
어찌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찌 모든 것을 이루신 그 기쁨을 가늠할 수 있을까.
어찌 사랑하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신 그 감격을 헤아릴 수 있을까.
어찌 세상이 누릴 구원의 은혜를 이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