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똥>은 과소평가되었다

예술가의 똥 - 두 번째 이야기

by 김경섭

과대해석과 과소해석의 사이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_1961> 작품을 보고 그 숨겨진 의미를 바로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고차원적 개그를 보고 남들이 다 웃고 난 후 뒤늦게 배를 잡고 뒤집어지고, 별도의 해석과 설명 없이는 예술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 역시 cpu의 속도와 용량이 486 수준인지라, 심도 있게 이해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많은 것들은 과대해석과 의미확대의 오류에 의해 이미지가 부풀려지고 과대평가된다.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그렇다.


그런데 모든 예술 작품들이 그렇지는 않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대부분의 작품들은 그 작품이 품는 본연의 가치만큼 과 작가의 의도나 심어놓은 의미만큼에 턱도 없을 만큼 부족하게 해석되고 평가절하되어 곧 사라진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아 왕관을 쓰는 소수의 작품들은 끝도 없이 이미지가 부풀려지고 해석의 겹이 추가가 된다. 자기가 의도하고 생각한 것이 아니어도 더 좋게 해석해 주는 것을 거부하고 싫어할 작가는 없다. 작품의 해석이 더욱 풍성해지고 가치는 올라가는데 말이다.


물론 홑겹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얕은 작품도 있고, 여러 겹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도 있다. 한정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작품에 넣는 것도 능력이다. 그리고 운이 매우 좋으면 그 능력 훨씬 이상의 보상을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 배의 능력의 차이는 두 배 내지는 이십 배의 수확 결과가 아니라, 이천 배 내지는 이만 배의 차이로 귀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면 작품이 여러 층위로 해석되기 위해, 그저 막연하고 무책임하고 모호한, 별 것도 없으면서 무언가 있는 척만 하는 맥거핀 남발 작품들이 또 여기저기서 난무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만초니의 작품 또한 유명세에 의해 가치가 더욱 부풀려지고 나처럼 호들갑 떨며 추켜세우는 사람들에 의해 더 신격화되는 것은 아닌지 자문을 해봤다. 그런 것들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대단한 것들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더욱 대단해지고 훨씬 더 강력해지는 이미지(시뮬라크르)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그 한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도 보고 맥락을 살펴보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더 알 수 있고, 그냥 운 좋게 부풀려진 이미지를 가진 작가(그런 경우는 많다.)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line_1959>이라는 작품이 있다. 좁고 긴 종이에 선을 주욱 그어 돌돌 말은 뒤에 그것을 불투명한 원통에 넣고 밀봉한 작품이다. 상자 위에는 선의 길이, 날짜, 서명 등이 기재되어 있다. <예술가의 똥_1961>과 같은 내용의 작품으로서 그전 단계에 했던 작품이다.



소재만 바뀌었을 뿐 같은 이야기가 담긴 작업이다. 눈에 보이는 선을 제시하고 선이라고 하는 작품과,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선이라고 하는 작품은 완전히 달라진다. ‘믿음’의 문제로 이전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정말로 선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망가뜨려야 되고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작품이 되지 못한다. 물리적 실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관념과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풀이하면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위적 주장이나 종교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불편하고 감추어진 현실을 은유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_1961> 작품을 깊이 이해했고, 그 작품이 확대해석되고 과대평가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1단계 해석에서 그치고 제대로 된 해석까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만초니 작품에 대한 대부분의 소개와 설명은 그 단계에서 그친다. 사람들은 ‘똥’에 꽂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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