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에 대학생일 때였던 것 같다. 한 갤러리 대표가 쓴 책에서, 갤러리를 하는 즐거움과 그 이유에 대해서 본 적이 있다.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대목을 보며 공감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동경하는 마음과 존경심이 생기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많은 말들과 예술작품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일면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입체적이고 모순적이다.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온갖 추잡하고 아이러니한 면들이 숨겨지거나 위장된 채로 있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이 전시되고 보이고 거래되는 갤러리나 미술관 등에, 그 갤러리 대표의 말처럼 아름답고 좋은 사람들만 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고, 그 대표 또한 그것을 숨겼다기보다는 굳이 어두운 부분까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을 왜곡하고 편집하며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부분을 확대해서 본다.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부분을 애써 외면하고 축소시키려 할 것이고, 부정적인 사람은 또 그 반대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욕구의 욕구’와 ‘욕망의 욕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골초이지만 담배를 끊으려 하는 사람의 진짜 욕구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인 걸까? 담배를 끊고 싶은 욕구인 걸까? 1차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이다. 하지만 2차적이고 의지적인 욕구는 담배를 끊고 싶은 욕구이다. 그렇게 모순되는 2차 욕구가 담배를 피우고 싶지만 담배를 끊고 싶은 ‘욕구의 욕구’이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사람의 욕구는, 공부는 하기 싫지만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의 욕구이다. 책은 읽기 싫지만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욕구의 욕구이고, 어떤 미술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 좋아하고 싶은 것도 욕구의 욕구이다. 인간의 겹을 하나하나 벗기고 나면 그렇게 모순되는 욕구와 욕망이 남는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 중에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을 타고나서 그저 자신의 1차 욕구에 충실한 사람도 있지만, 2차 욕구(욕구의 욕구)로써 애써 긍정적인 시선을 갖추려고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척’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 생존과 자신의 이미지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갤러리 운영의 보람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그 대표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런 사람이려 노력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의 역할과 이익에 충실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술 작품의 주변에는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열정적이고 순수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존재하겠지만, 저마다 다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척’ 들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잘난 사람도 있고 잘난 척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척하는 사람도 있고, 심오한 사람도 있고 심오한 척하는 사람도 있다. 온갖 그런 사람과 그런 척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 이런 사람들과 저런 사람들을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각자의 믿음과 편견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런 것들은 한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는 면 들이다. 우리 모두는 그 한 사람에 해당한다. 각자마다 밸런스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어떤 미술과 그 주변의 사람들은 인간들의 위선과 가식, 허례허식과 속물근성의 종합경연장이기도 하다. 예술의 아름다움과 사유의 깊이로 그것들을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 거기서 거기지 나도 대단할 것 없고 너도 대단할 것 없다는 짠한 마음으로 보면 경멸스럽게만 볼 것도 아니다. 틈바구니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조금이라도 더 우월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모습이 웃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런 특성들을 크고 작게 가지고 있는 존재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