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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a H Feb 18. 2021

내면을 아름다운 만화로 '승화'시킨 감독, 미야자키

수전 네이피어 <미야자키 월드>

2000년대 초 처음으로 지브리 영화를 접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선생님께서 <이웃집 토토로>를 DVD로 보여주셨는데, 그때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원래 봐왔던 만화 장르가 아닌 느낌이 들었다. 특히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의 생김새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후 지브리 영화를 볼 기회는 많았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족히 10번도 넘게 본 것 같다. 이성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중학교 때는 치히로에게 주먹밥을 건네는 하쿠에게 푹 빠졌고, 소피의 손을 잡고 하늘을 걷는 하울에게도 푹 빠졌다. 학교에서는 내가 만화 주인공을 짝사랑(?) 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워 아닌 척 숨겼던 기억도 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가끔씩 감성에 빠져들고 싶은 날에는 어김없기 지브리 영화를 봤다. 왜 그렇게 지브리 영화만 보면 나도 모르게 사색적으로 변하는지 잘 몰랐다. 그냥 그림이 예뻐서, 스토리가 아름다워서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이번에 <미야자키 월드>를 읽고 왜 지브리 영화를 보고 나면 먹먹해지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야자키 감독은 자신만화에 자전적 메시지를 녹여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만화 속 숨은 의미를 알게 되었고, 만화를 제작하는 동안 미야자키 감독이 어떤 생각을 하며 만들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책을 다 읽은 시점, 나는 미야자키의 내면을 드러내는 몇 가지 키워드를 발견하게 되었다.


트라우마

사실 미야자키는 예술 활동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미야자키는 트라우마 보다는 인내와 미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처를 지울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견디는 수밖에 없다. 치유할 방법은 없다." 그는 감정의 상처가 "인간 존재의 기본 요소"이므로 "그저 감내해야"한다고 말한다. p.34-35

지브리 만화를 살펴보면 단골로 등장하는 몇 가지 주제가 있다. 전쟁, 상실, 자연재해다. 일본인에게는 전쟁의 기억이 끔찍하게 남아있다. 그로 인해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까지 빼앗긴 아픈 기억이 있다.(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또한 일본은 지진과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미야자키의 만화를 보면 지진과 쓰나미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이와 같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이 분다>를 보면 주인공이 "그래도 살아가야 해" 하고 말한다. 이 대사는 트라우마를 대하는 미야자키의 관점이라 볼 수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람이 분다 - 도쿄 대지진 장면>

  

존재 간 연결

미야자키는 작품을 통해 일본 역사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는 애니메이션의 마법을 통해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육체, 성, 종족, 자연, 초자연의 전통적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를 세밀하게 만들었다. p.323

미야자키 감독은 일본의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경계했다. 산업화로 인해 일본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고, 자연이 오염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와 더불어 물질주의적 가치관 또한 신랄하게 비판했다. 책을 살펴보면 감독은 급변하는 일본 사회를 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야자키는 만화를 통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렸다. 자연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인간은 모든 존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모노노케 히메>,<이웃집 토토로>

희망 그리고 회복

미야자키는 현실의 트라우마를 마법으로 극복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자연과 상상의 힘이 우리에게 자신을 초월하고 삶의 역경을 극복하게 해 준다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한다. (...) 미야자키 세계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열린 마음과 이해는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것, 다시 말해 우리 문화와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회복시켜준다. p.217-219

지브리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모두 다 밝다. 얼굴은 소년과 소녀지만,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웬만한 성인보다 낫다. 미야자키 감독은 평범해 보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감독은 평범하고 나약해 보이는 어린 주인공이 시련을 헤쳐나가는 서사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한다. 또한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매우 아름답게 묘사하며, 트라우마를 마법 같은 순간으로 '승화' 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벼랑 위의 포뇨>, <마녀 배달부 키키>





<미야자키 월드>를 읽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새롭게 다가왔다. 감성, 예쁜 그림체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지브리 덕질(!)한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만화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정말 재미없는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경험은 히든 에셋이 된다는데, 이런 사소한 덕질까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어쨌든, 나는 <미야자키 월드>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혹시 지브리 덕후가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미야자키 감독이 여기저기 숨겨놓은 메시지를 발견하는 재미를 얻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도서>

<사진출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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