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na H Jul 04. 2020

영어시험 하나 쳤을 뿐인데, 인생을 배웠다.

나는 음대 출신(클래식 피아노 전공)이다. 당시 졸업연주에 온 신경을 쏟느라 취업 혹은 알바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졸업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교육대학원까지 덜컥 합격해버린 상태라, 일반 직장을 다니는 건 무리가 있었다. 결국, 24살의 나는 한마디로 백수가 되어 버렸다.

 

어느 날 우연히 유치부 영어강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시간도 대학원 수업시간에 지장 없겠다, 바로 연락을 해서 학원 원장님과 면접을 봤다. 결국 음대 출신인 나는 우연찮게 전공과 무관한 신입 파트타임 영어강사가 되었다. 영문과를 나온 사람들 틈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취직의 기쁨도 잠시 학원 일을 하다가 영어실력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영어를 꽤 하는 편인 줄 알았는데, 막상 전공자와 부딪치려니 형편없는 실력이 내 발목을 잡았다.


처음 2년 동안은 엉망진창이던 영어 기초 실력을 바로잡으려 하루에 2~3시간을 공부했다.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은 자기 전에 30분 정도 다음날 수업할 내용을 숙지하고, 수업이 없는 날은 기초 영어 문제집을 풀었다. 물론, 매일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사람다운(?) 상태가 아니었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따끈따끈한 사회 초년생에다, 대학 때 아무렇게나 자는 습관이 몸에 밴 상태라 보통 일주일에 3번 정도 따로 영어공부를 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영어공부를 하다 보니 학원 수업을 할 때 어려움이 줄어들고 아이들을 대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 좀 했다고 교만했던 탓인지, 3년 차부터는 집에서 따로 공부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줄어들지 않고 수업이 유지됐지만, 점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수업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학원 일도 더 이상 하기 싫은 상태에 이르렀다.


4년 차 되던 해(작년)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영어시험을 쳐 보자. 도전하자'는 마음이 불쑥 떠올랐다. 직업은 영어강사였지만 단 한번도 영어관련 시험을 쳐 본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영어시험은 토익, 토플, 아이엘츠가 전부였다. 가장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토익 문제를 풀어보았다. 전혀 끌리지 않았다. 본문 내용이 맘에 들지 않았고, 문제 형식도 별로였다. 토플은 컴퓨터로 시험을 친다고 들었다. 음..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눈이 엄청 나빠질 것 같았다. (이유도 참 별스럽다) 그나마 가장 끌렸던(?) 시험은 아이엘츠였다.


아이엘츠는 손으로 시험을 치고, 원어민 감독관 앞에서 인터뷰를 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이팅 주제도 자유롭고 본문 내용 또한 주제가 다양한 게 마음에 들었다. 이 시험으로 영어공부를 하면 힘들겠지만 얻어가는 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년 중순부터 다시 문법과 단어와 원서 읽기를 시작했다. 퇴사 후 시험 준비를 하려면 미리미리 기초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2월 말 퇴사를 했고, 시험 날짜는 6월 20일로 정했다. 공부기간은 3개월을 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영어 시험 하나만 과하게 몰두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독서도 많이 하고 싶었고, 글도 써 보고 싶었고, 다른 여러 것들을 배우고 싶었다.


공부를 하기 앞서 루틴을 세웠다. 당시 나의 루틴은 이랬다.

9시 - 기상, 옷 단정하게 입기, 스트레칭
10시~12시 - 리딩, 리스닝 공부
12시~1시 - 점심
1시~2시 - 라이팅 첨삭 체크, 영어 뉴스 보기, TED 강의 시청
2시~2시 30분 - 화상영어 스피킹 연습
2시 30분~3시 - 휴식
3시~4시 - 한 달 쓰기 글 적기
4시~6시 - 라이팅 숙제 검색, 작성하기
6시~7시 - 저녁
7시~8시 - 운동
8시~9시 - 미리 이불 깔기, 씻기
9시~12시-원서 읽기, 독서
12시~1시 - 감사 적기, 일기 쓰기, 핸드폰 구경하다 잠들기 (보통 1시 30분에 잠..)

불규칙한 삶을 살다 다시 규칙적으로 살려니 처음 한 달은 많이 힘들었다. 공부 중간에 딴짓(페북, 인스타)을 할 때도 있었고, 바닥에 누워 천장만 쳐다볼 때도 있었고,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해 공부하다 집 근처 마트에 가서 맛있는걸 왕창 산 적도 있었다.(나름 일탈). 그리고 토, 일요일까지 공부에 매여 있기 싫어 집 청소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는 핑계삼에 공부를 하지 않았다. 대신 책을 읽고 블로그와 브런치에 올라온 글을 구경했다 물론 유튜브도 몰아서 봤다.


시간이 흘러 시험 당일이 되었다. 당시 컨디션은 매우 좋았고 혼자서 자신감이 (엄밀히 말하면 '') 넘친 상태였다. 좋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주어진 시험 문제를 제시간에 다 풀고 오자는 마음가짐으로 시험을 쳤다. 라이팅 시간에는 의식의 흐름대로 손 가는 대로 그냥 적었다. 리딩과 리스닝은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풀었다. 원어민 인터뷰 시간에는 내가 아는 만큼 (이것도 의식의 흐름대로) 말했다. 원어민 감독관은 친절했지만 점수 주는 건 냉정했다.


시험 결과는? 대실패다. 아니, 참패라는 표현이 맞겠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로 점수가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억울하거나 아쉽거나 하는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험 덕분에 많은 걸 배다. 첫째, 시간을 체계적으로 쓰는 법을 익혔고 둘째, 영어 실력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의식적 노력과 피드백을 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만약 이 시험을 치지 않았다면 스스로 영어를 좀 한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을 것이다. 틀린 문제를 봐도 거기서 모르는 단어를 찾고, 다시 풀어보고, 내가 왜 틀렸는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영어 실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줘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화상영어 선생님이 틀린 영어 표현을 쓰는 걸 지적할 때 수긍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최종 결과는 실패했지만 이 시험을 통해 영어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원서와 뉴스를 읽는 게 힘들지 않게 되었고(아예 쉬워진 건 아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답답하기도 함), 내용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영어 영상에 한국어 자막 있는 게 불편할 정도가 되었다. 영어 뉘앙스랑 한국어 자막이랑 맞지 않으면 혼자서 불-편해한다. 어쨌든 의미 있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힘들었지만 나름 즐거웠다!



다시 읽어보니 글이 네*버 블로그 후기 느낌이 나지만 그래도 나만의 기록을 남긴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겠다.

공부한 흔적들. 윽..사진만 봐도..속이 메스껍다.
실패한 점수 기록.


작가의 이전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피곤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