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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라카노 하루끼 May 20. 2023

청보리밭, 모네, 바람?

청보리밭 풍경과 소리.    꼭! 한 번 느껴보세요






 1980년 5월 초 광주 변두리 어느 동네.


어른들은 불안해했던 것 같았지만,

그나마 나에겐 아직까지 평화롭던 봄 날이었다.


보리가 아직은 파란색을 많이 유지하던 였으니

막 4월 말을 지난 5월의 첫날부터 어느 즈음 어느  오후쯤들의 기억들이

에겐 깊이 남아있다.




수업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방을 마루에 팽개치듯 내 던져놓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으로 달려 나섰다.


자랄 대로 자란 멋진  청보리밭.

그 밭두렁 사이를 가로질러 종종 거리며 달려가다 숨이 차면 멈춰 서서

멍 때리며 가만히 서 있기를 반복했다.



더 이상 달려가기 힘들어지면

밭두렁에 그냥 서서 청보리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청보리로 가득 찬 들판과 그 너머를 바라보곤 했던 기억.


그 보리밭에 바람이 불면

경주하듯 달려가는 바람의 길들이 보였다.


늦은 햇살을 즐기던 보리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기댄  손을 잡고 군무를 추듯

부드럽게 사삭 사삭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줬.


들판과 산들을 쏘다니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석양이 지기 시작할  바라봤던 청보리밭은

조금씩 갈색이 섞여 빛바래져 가는

 청색과 옅은 오렌지색 노을빛이 섞여 아름답기도,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던 묘한 느낌의 풍경으로 변해 있곤 했다.


이 날들이 지나 몇 주 후 광주 변두리의 우리 동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거나 죽었다.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묘한 느낌의 그림



Madame Monet and Her Son, 1875, Claude Monet,  프랑스, 100x81cm,    내셔널 갤러리 , 워싱턴 D.C.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클로드 모네다.


오랑주리 미술관 입구 쪽 있는

 너무나 아름답고 거대한  수련 연작들.  

 그림 랑주리 홀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숨이 멈출 것만 같은 아름다움에  원형 벤치에 앉아 한참을 하나하나 돌아가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수련 연작들보다

양산을 든 여인을 더 좋아한다.


오래전, 미국에 장기 출장을 갔을 때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봤던 추억의 그림.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의

평일 오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까미유와 장을 그린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앞에 서서, 다리가 아프면 다시 멀찍이 떨어져서,

한 시간 동안 이 그림때리듯 바라보았다.

( 하지만, 지금 글을 적으며 생각해 보니 아들에게는 너무 지루한 시간이었을지도...)



다른 멋진 그림도 많았지만,

유독 이 그림을 좋아했던 이유는,

어릴 적 그날 보리밭에서의 느낌이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공존했던  80년 5월 청보리밭의 기억.

 

그때 청보리밭에 불던 바람의 길들, 소리들, 색감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베일 속 까미유의 머리칼과 옷자락, 흔들거리는 꽃들,

그리고 흩어져 흘러가는 구름들이 오버랩되곤 했었다.




모델과 화가로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모네 집안의 반대로 힘겨운 생활을 했던 두 사람.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네와 알리스의 바람 사이에서 힘들어했던  까미유.

자신을 향했던 사랑은 이미 추억이 돼버렸음을 알았을 때 

쓸쓸한 까미유의 표정이 이 그림에 오롯이 남아있었다면 나의 착각일까.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트리거들이 있다.

5월 광주의 청보리밭. 모네 그리고 까미유.

그들의 작품 양산을 든 여인.





여러분들도 좋은 기억을 소환하는 트리거들이 있지요?







 

( 모네는 여러 버전의 양산을 든 여인을 그렸었다. 위 그림은 까미유가 아닌 쉬잔을 모델로 한 것이다.

쉬잔은 까미유가 병으로 죽은 후 재혼한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의 딸이다. 모네는 그립고 미안한 까미유의 얼굴을 거기에 그려 넣을 수 없었기에 얼굴 또한 매우 흐릿하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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