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싸는 마음
이야기는 출발하기 전부터 시작한다. 여행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준비 단계의 기대와 설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모험을 준비하며 짐을 싸는 마음, 캐리어에 담는 짐 하나하나에 설렘이 담기는 순간들을 말이다. 20대 때 돈과 시간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다 보니 짐 싸는 데엔 도사가 되었다. 저녁 비행기라면 당일 아침에 싸도 충분할 정도다.
혼자 하는 제주도 여행엔 뭐가 필요할까? 글을 쓸 테니 노트와 펜을 가져가야 하겠고 노트북도 필수다. 읽을 책을 따로 가져가니까 아이패드는 패스. 평상시 입을 옷, 잠옷, 속옷, 양말 따위가 필요하고 일회용품이나 상비약도 챙겨야 한다. 언제 필요할지 모를 개인 위생용품도 알뜰히 챙긴다.
여행할 땐 항상 책을 몇 권 가져간다. 공항이나 비행기에서 틈틈이 읽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함께할 책을 고르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처음엔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두 권만 챙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처음 보는 하루키의 여행기를 발견하는 바람에 총 세 권이 되고 말았다. 바로 『우천염전』이라는 책이다. 1988년, 서른아홉의 하루키가 터키와 그리스를 여행한 기록을 담고 있다. 언젠가 그리스에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 계기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였기에, 작가의 또 다른 그리스 여행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두 권이냐 세 권이냐 끝까지 고민하다 결국 세 권 다 가방에 넣어버렸다. 일주일 여정에는 어떻게 봐도 과한 양이다. 한 권도 다 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결과적으로는 한 권 반 정도 읽게 됐지만) 어느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은 욕심일지언정 나다운 선택이었다.
짐 싸기에는 그 사람 고유의 특성이 반영된다. 일종의 '짐 싸기 패턴'이다. 대체로 가족의 스타일을 따르지만 강력한 개성이 그 사람만의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의 경우,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비약을 바리바리 싸 주시던 어머니의 방식을 이어받은 데다가 무엇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욕심 많은 성향까지 더해져 '슈퍼 맥시멀리스트' 패턴이 완성되고 말았다.
이를테면 책을 세 권이나 챙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식사로 먹을 빵 두 종류와 곁들일 땅콩버터, 그리고 딸기잼까지 챙기는 식이다. 무겁고 깨지기도 쉬운 잼 유리병을 도톰한 츄리닝 바지로 돌돌 말아 옷 사이에 끼워 넣는다. 뺄까 말까 망설였지만 역시 가져가기로 한다.
무겁고 미련하대도 할 수 없다. 제주도에서의 첫날을 원하는 스타일의 아침식사로 시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그 그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에 구현하지 않을 수 없다.(이 책이 쓰이고 있는 이유도 같다. 완성된 그림이 머릿속에 뻔히 그려지는데 어찌 세상 밖으로 내놓지 않을 수 있을까.) 성산일출봉 앞의 숙소도 일부러 테이블과 냉장고가 있는 곳을 골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육지서부터 꾸역꾸역 챙겨간 빵과 잼과 땅콩버터를 꺼내어 우유랑 먹을 테다. 그리고 곧장 성산일출봉을 오르러 가야지. 완벽한 계획이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준비물(빵과 잼)을 400km 떨어진 곳에서부터 16시간 앞서 준비해 놓는다. '어차피 렌터카 빌릴 거니까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잖아'라며 나름대로의 수고와 보상을 계산한다.
한편, 이런 나와 달리 치약, 칫솔, 지갑만 가지고 소풍 가듯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살아가는 데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은 유형이다. 이들의 짐은 간소하다. 위탁수하물도 필요하지 않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공항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여행을 시작한다. 한때는 이런 미니멀리즘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라는 사람은 언제든 원하는 책을 읽고 싶고, 땅콩버터도 딸기잼도 먹고 싶은 사람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약간의 무거움만 감당하면 되는데 '가벼움에 대한 동경'만으로 포기하기에는 영 아쉽다. 리스크와 베네핏을 따져봐도 가져가자는 결론이 나온다.
자신을 잘 알면 얼핏 부정적으로 보이는 자신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를테면 이 탐욕스러운 맥시멀리즘도 원하는 모양의 행복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해진 무게를 기꺼이 짊어짐으로써 나는 내일 아침 성산의 숙소에서 유명 베이커리의 유기농 통밀빵에 100% 무첨가 땅콩버터를 발라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왜 제주도까지 가서 육지 빵을 먹냐 하겠지만, 빵집이 닫는 시간에 도착하기에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나는 책에 워크북 페이지가 있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괜스레 독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처럼 과하더라도 꼼꼼하게 짐을 꾸리는 맥시멀리스트인가, 아니면 쉽고 가볍게 출발하는 미니멀리스트인가? 여행을 꿈꾸는 당신의 '짐 싸기 패턴'은 어떤 모양인가?
한번 생각해 봐도 좋을 것이다. 당신의 캐리어가 당신에 대해 어떤 점을 말해주는지, 그리고 당신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여행이란 놈은 이렇게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제주도 여행기는 계속됩니다. 구독해 두시면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