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독학 재수 학원은 매일 점심시간 직후 영어 듣기 평가를 실시했다. 약 20분 정도 정해진 교재로 진행된다. 학원에 다니면 누구라도 해야 한다. 내가 비록 영어 1등급을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해도.
다들 각자의 강점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나는 영어와 국어가 그랬다. 심지어 대학 다닐 때도 영어나 독해력 때문에 고생해본 적은 없다. 그래도 규칙이니까 따라야 했다. 남들 다 열심히 듣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나 혼자 사각사각 수학 문제 풀고 있으면 분위기를 흐릴 테니까. 별 말없이 참여하는 게 맞다. 그렇죠?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겨우 20분이 아니라 무려 20분이다. 이기적인 걸까? 하지만 누구나 각자의 간절한 목표를 가지고 여기에 온 거 아닌가? 나 지금 무지 간절한데. 영어 듣기 평가 시간엔 시간 가는 게 너무 느리다. 아깝다. 낭비하고 있는 내 황금 같은 시간이 아까워 죽겠다.
요령 있는 사람이라면 학원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듣기 평가를 빼거나 그 시간에 적당히 눈치 보며 다른 일을 했을 거다. 그러기엔 꽉 막힌 성격인 나는 그냥 울상으로 듣기 평가를 풀었다. 그래, 이것도 도움이 되겠지. 그렇지만 가끔은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쓸데없는데 시간 낭비하는 걸 거의 증오하는 수준으로 싫어한다.
살다 보면 필요 없어 보이는 일에도 내 시간을 써야 할 때가 많다. 단체 생활에 뒤따르는 수많은 회식과 모임들, 지루하기만 한 의례 행사들. 혹은 매일 점심 먹고 푸는 영어 듣기 평가 라던가.
그때는 내가 참 여유가 없었다. 가끔, 아니 자주 불안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시간 낭비면 어떡하지. 이러다 1년 그냥 날린 초라한 복학생이 되는 건 아닐까. 미술도 공부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고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그 실망감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툭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돌아가는 것도 삶의 당연한 부분이고, 모든 일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도 참 당연하다. 원래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조금 더 지혜로웠다면 싫기만 한 듣기평가 시간을 한 숨 돌리는 휴식 시간으로 삼았을 것이다. 마음대로 안 되는 부분을 받아들이면서.
어쩌면 지금도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내가 만약 심적으로 여유로웠다면 지금처럼 행동했을까? 지금 내 행동은, 현명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