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 일 줄은 몰랐는데. 시민 단체가 의사를 뽑는다니.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눈에 훤하다. 할 말이 많다. 왜 의사들이 이 시국에 파업을 하고 의대생들이 동맹휴학을 불사하는지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만 의견을 좀 얹어보려 한다. 코로나로 급박한 시국에 파업을 하는 의사들이 이해가지 않고 원망스럽기도 하겠지만. 모두 각자의 입장이 있음을 알아주시길 바라며 한 의대생의 부족한 의견이나마 글로 옮겨본다. 스크롤 주의.
정부의 공공의대 추진정책은 요즘 워낙 언론에서 많이 언급하니 다들 알고 계시라 생각한다. 짧게 요약하자면, 공공의대 설립을 통해 의대 정원을 매년 최대 400명 증설하고, 최종적으로는 10년 안에 4000명을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대신 공공의대를 통해 의사가 된 졸업생들은 졸업 후 10년간 공공의료 분야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한다.
언뜻 보면 현재 인력이 매우 부족한 기초의학과 공공의료분야에 인원을 투입해 주는 좋은 정책 같지만 실정은 문제가 많다. 우선 현재 기초의학, 기피과, 공공의료 분야 인원이 심각하게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소아외과, 외상외과, 일반외과, 흉부외과, 감염내과 등 '기피과'들은 메이저 병원조차도 레지던트(전공의)를 모셔 데려간다. 지원자가 없기 때문이다.
왜 고등학교 때 미친 듯이 공부하고 학교에서도 6년을 공부만 한, 공부 엘리트 의사들이 기피과에 가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급료, 일자리, 삶의 질, 모든 것이 노력한 것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의사 라이센스'를 위해 대학에서 6년을 공부하고, '전공의 자격'을 위해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의 긴 시간을 수련한다. 전문의 의사가 되려면 최소 11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삶을 시작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그 긴 과정을 거쳐서 '기피과' 전문의가 되었다고 해보자. 무슨 길을 갈 수 있나? 할 수 있는 게 없다. 때론 병원에 적자를 안겨주기까지 하는 수술, 밤샘 당직, 체력적으로 뼈를 깎는 수술에 퇴근도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고 대학병원을 나와 개원을 하자니 기피과 의료는 대체로 고급 장비와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해 개원이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대학병원으로 돌아가 교수가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채로 펠로우 의사로 일한다. '인기과' 의사가 개원을 해서 자기 사업을 펼치거나, 미용 쪽으로 수억 원을 버는 의사들에 비해 너무나도 힘겨운 행보인 것이다. 게다가 의사는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든 직업이다. 사명감 만으로 버틸 수가 없다. 오죽하면 그 유명한 아주대 이국종 교수님이 그렇게 호소를 하셨겠는가.
아무도 굳이 힘들게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6시면 퇴근해서 발 뻗고 잘 수 있고, 잘하면 큰돈도 벌고, 의료소송 가능성도 적은 미용이나 인기과로 학생들이 몰리게 된다. 당연한 이치다. 밥그릇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의사들이라 말해도, 이 세상에 밥그릇 안 챙기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모두 개인의 선택에 따라 의사가 된 사람들이다. 의사가 되려고 태어났거나, 정부가 요원으로 기른, 공공재가 아니란 말이다. 모두 자기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기피과는 대체로 꼭 필요한 과들이다. 때로는 의료의 핵심인 과들도 있다. 돈이 안 된다고 응급환자를 안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가장 실력 있고 수준 높은 의사들이 응급 수술을 집도하는 게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의료계에 있어서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기피과 지원'이다.
공공의대 만들어도 결국 인기과 간다. 공공의대 만들어서 4000명의 의사가 생겼다. 좋다. 질을 보장할 수 없는 공공의대의 교육을 받은 초보 의사들은 10년간 기피과와 공공분야에서 근무하게 된다. 좋다. 그럼 10년의 근무가 끝나면 아직 창창한 30대일 이 의사들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계속 기피과에서 일할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 확신한다. 인기과 경쟁만 더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증원되는 의사들도 사람이니 더 나은 삶을 원한다. 눈앞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어찌 주어진 곳에 머무르리오.
그러니 의사를 만들어 강제적으로 기피과에 꽂을 것이 아니라, 기피과를 '갈 만한 과, 보상이 있는 과'로 만들어야 한다. 기피과를 지원한 의사들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스스로의 업무를 자랑스럽게 느껴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살 만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피과를 살릴 수 있다.
공공의대 만들 돈으로 기피과 지원해 줘라.
문제가 바로 해결될 것이다. 이국종 교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하신 것도 결국 턱없이 열악한 기피과를 지원의 필요성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 뻔히 있는데 왜 공공의대를 새로 만들려고 하나? 이건 로얄들을 위한 사다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미 특정 지역에서는 자기네 지역에 의대를 설립하려고 확정까지 받아놓았단다. 결국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이 아닌가? 자기네 지역에 의대 설립하고, 자기네 아들딸들 의대 보내려는 노력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심지어 시민단체를 보고 추천해서 의사를 뽑게 한단다. 대체 왜? 시민 단체가 수능과 입시보다 공정할 거란 보장이 어디 있나? 물론 공부만이 정답은 아니지만, 노력과 의지로 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아닌가. 추천은 그렇지 않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민단체 추천'을 통해 뼈를 깎는 노력이란 응당한 경로를 추천으로 '스킵'하고 의사가 될 사람들이 어디서 올지 뻔히 보일 것이다.
당장 우리 학교만 해도 부모님 백으로 의대에 편입한 '로얄'이 있다. 쉬쉬하지만 다들 알고 있다. 로얄, 왕족. 참고 노력하고 공부하는 노력의 시간 없이, 혈통이 고귀해서 의사가 되는 사람들. 시민 단체가 왕족을 추대해 올리면, 이제 의대는 평민은 접근도 할 수 없는 귀족 모임이 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공공의대 설립 자체는 좋은 측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했지만, 시민단체 추천이란 함정이 있는지는 오늘 알았다. 충격적이다. 진짜 의사가 사람이 아니라 공공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의사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환자들이 어떻게 대접받으리라 생각하는가? 제발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왜 사람들을 치료하고 치유하는 걸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왔겠는가. 의사는 악이 아니다. 사람이다.
물론 의사들도 욕을 많이 먹고 그럴만한 이유도 있는 거 안다. 모든 문제는 각자 입장에 따른 시각이 있다. 이 글에 동의하지 않을 분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본 기사가 너무 충격적이라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료계는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정부 얘기도 들어야겠지만 의료계가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지도 들어봐 주셨으면 좋겠다.
의대생의 짧은 식견으로 글을 써 보았다. 아직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도 아니고, 학생일 뿐이라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다. 보충이든 반박이든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댓글로 달아주시라. 한숨 나오는 날들이다. 글 읽으시는 분들 모두 건강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