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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Jul 21. 2020

예민한 사람들

예민함과 나약함 사이에서

남들보다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작은 소음이나 갑작스런 빛, 가벼운 터치에 지나치리만큼 민감한 사람들. 사소한 자극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새가슴. 내가 그렇다.


예민한 사람은 금방 피곤해진다. 희미한 자극도 뚜렷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이 증폭기를 거친다. 빗소리도, 잡담 소리도, 심지어는 내 발소리조차 거슬리기 짝이 없다. 쉬이 짜증이 난다. 짜증 많은 사람은 어울리기 번거롭다. 나는 번거로운 사람이 된다.


예민한 사람은 쉽게 상처 받는다. 다른 사람이 별 뜻 없이 한 말도 확대 해석하기 십상이다. 민감도 높은 레이더가 상시 가동하며 말 뒤의 숨은 의도를 탐색한다. 문제는 이 레이더가 민감도만 높지 정확도는 그저 그런 수준이라는 거다. 불쾌한 상상력이 활개 친다. 뛰어난 상상력은 거짓된 내러티브를 만든다. 근거 없는 불안과 걱정은 덤으로 따라붙는다.


게다가 이 레이더는 당신이 잘 감췄다고 생각한 약간의 불편조차 탐지해낸다. 우리는 그 불편을 내면화한다. 상처 준 사람이 없는데 상처 받는다. 정말 피곤한 성격이다.


당신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모든 불필요한 고통에 공감하리라. 남들이 감지조차 못한 포인트에 반응하기에 이해도 어렵다. 불필요한 감정 낭비는 기본이고 타인에게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공감받지 못한 날카로움은 때론 스스로를 찌른다.


이런 우리의 예민함은, 나약함일까?




어릴 때는 그렇게 믿었다. 내가 어딘가 잘못된 줄 알았다. 너무나 쉽게 상처 받고 마는 나약함이 증오스러웠다.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강한 도덕감은 또래와의 공감을 방해했고 섬세한 감수성은 대중문화에서 인디밴드로 눈을 돌리게 했다. 청소년기의 나는 마이너리티가 되고 싶지 않았다. 외로운 게 싫었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을 거쳐 깨달았다. 독특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나의 예민함은 사랑스럽고 소중한 정체성이다. 억지로 만든다고 만들 수 없고, 없애려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 나의 기질. 평생 함께해야 한다면 미워하기보단 끌어안아주자. 그러려면 먼저 네가 무엇인지,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똑바로 보아야겠다.


성격의 장단점을 써 보았다. 예민함은 생각보다 멋진 놈이었다. 사소함을 캐치하는 능력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한다. 문맥을 읽는데 능하며 상황 파악이 빠르다. 행간을 읽는 것이 익숙하다. 상대의 기분을 재빨리 파악하기에 심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회피할 수 있다.


 또, 섬세하기에 아름다움에 민감하다.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간다. 스쳐가는 바람에서 이야기를 읽고 동네 시냇물 소리에서 가사를 듣는다. 색의 얼룩에서 짜릿한 조화를 찾아낸다.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은 놀라운 포착의 순간들을 선사한다.


예민한 사람의 일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게다가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꽤 있더라. 다수는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예민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엔 수천, 수만 가지의 성격이 있고 각자의 장단점과 고민이 있다. 나에겐 나의 과제, 당신에겐 당신의 과제. 그러니 수천수만 가지 중 하나인 자신의 성격을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부정적으로만 보였던 성격도 잘 살펴보면 사랑스러운 점이 있다. 그 독특함을 자신의 자산으로 삼자.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가꾸어주면 예쁜 꽃으로 피어날 터다. 힘든 날을 견디게 하고 위기에서 스스로를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꽃이 될 거다. 혹시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스스로의 일면이 있는가. 오늘부터라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물을 줘 보자. 어쩌면 사랑스럽고 소중한 평생의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Nein, 2020, 핸드폰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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