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일 뵙겠습니다.”
수업이 끝났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오늘 저녁은 좀 더 특별하기 때문이다. 호스트 커플이 저녁에 아랫집에서 하는 삼겹살 파티에 나를 초대해주었다. 아마 술을 마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식사 시간 전까지 오늘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고, 과제를 마쳐야했다.
과제를 제출하고 보니 15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모처럼 받은 초대인데 빈 손으로 가기에 민망하여 냉장고를 뒤져본다. 마침 심심할 때 씹으려고 사두었던 오이가 보여, 고기와 곁들이기 위해 오이를 씻고 손질하여 접시에 담았다. 오이 껍데기를 칼로 깎다보니 어렸을 적에 연필을 깎던 것과 비슷하여 꽤 능숙했다.
관광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말동안 맑던 날씨는 월요일부터 계속 흐리더니 급기야 오늘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삼겹살을 구울 수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해가 질 때쯤 하늘도 개여서 다행이었다.
“OO씨, 어서 와요.”
아랫집 뒷마당에는 꽤나 근사한 구색을 갖춘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테이블에는 뒷마당에는 텃밭에서 딴 걸로 보이는 다양한 크기의 상추가 물기를 머금고 생긋하게 담겨있었고, 할머니께서 잠녀 조합에서 받아온 양파가 모기향 모양으로 썰어진 채 소복이 쌓여있었다. 상추를 담은 바구니의 살짝 빈 공간에 가져온 오이를 채워놓으니 담음새가 좋았다. 호스트 누님은 21도짜리 페트병에 가득 담긴 한라산을 건네주시며 식사를 조금 늦게 해도 되냐고 물어왔다. 진천에서 근무했다는 사촌 동생이 오기로 했는데 조금 늦어지기 때문이랬다. 투박한 솜씨로 잘라온 오이를 부끄럽게 내어드렸는데 꽤나 반갑게 받아주어서 오히려 감사함을 느꼈다. 서른세 살 먹은 어른이 준비해 왔다고 보기엔 한없이 허접스러웠지만 준비해 왔다는 마음씨를 좋게 봐준 듯하다. 점심에 시켜 먹은 짬뽕을 덜어 고명들을 추가해 다시 끓인 짬뽕국은 맛도 맛이었지만 소박함과 센스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뒷마당 텃밭 위에 빨랫줄처럼 늘어진 전선 아래 매달린 전구들이 노란 파장의 불빛을 꿈뻑꿈뻑 뿜어대고, 그 곁에는 번개탄과 숯이 화로에서 서로의 열기를 주고받으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돌담을 넘어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는 바다에서는 파도가 무심한 듯 들어오고 부서지고를 반복했다. 펜션에서 2만원을 추가해서 흉내내보는 바베큐가 아닌 진짜 전원생활의 복판에 들어온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술잔을 나누며 누님과 제주도에 오게 된 계기, 이 숙소를 고르게 된 계기, 숙소를 머물면서 느낀 점 등 호스트라면 으레 궁금해 할 만 한 것들을 전했다. 바닷가에 인접하면서도 저렴한 가격, 나 같이 내성적인 사람에게 딱 맞는 ‘파티 없음’ 문구, 그리고 숙소 소개 사진에 도무지 뭔지 모를 빨간 바탕에 수직으로 그려진 고래 한 마리에 매료되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리고 그 고래 그림은 미술을 전공한 또 다른 사촌 동생이 그려주었다는 사연을 듣고는 멋진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러웠다.
“언니 나 왔어.”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형님과 사촌 동생이 자리에 합류하였다. 사촌 동생의 등장은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초등학생 아이가 개울가에서 잡아 온 개구리를 개선장군처럼 꺼내놓는 모양으로 트러플 소금을 내어놓으며 뭐든지 찍어 먹어도 맛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것이 신선하고 순수해보였다. 그리곤 환한 웃음을 펼치며,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자신을 백수라고 소개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누님과는 꽤 나이차이가 나 보였는데 오히려 나와 비슷한 또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기 전 설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자여서 놀랐다.
각자 멀리 흩어져 사는 네 명의 어색할 뻔한 저녁자리는 불기운이 남은 거뭇거뭇한 삼겹살과 제각기 선택한 다양한 종류의 술, 그리고 축축하고 살짝 비릿한 바닷바람을 깔고 그럴싸하게 진행 되었다. 서울, 대구, 진천, 그리고 청주에서 온 네 명은 각자의 삶의 궤도에서 잠깐의 이탈이 필요했고 이 작은 집은 그런 이탈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도대체 무슨 회사가 이 주 씩이나 직원에게 제주도에서 교육을 받게 해주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며 각자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자택 교육이라고 정말 자택에 박혀 있고 싶지 않아 숙소가 바뀌지 않는다면 사실상 자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의 다소 폭 넓은 유권 해석으로 시작 된 여정을 설명 드렸다. 그리고 어떠한 계획도, 약속도 없이 충동적으로 온 이 곳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게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십 년도 넘게 놓아두었던 글을 다시 쓰게 되면서 벌써 시작된 것 같다고 고백했다.
호스트 형님은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사는 분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가르침에 임하는 태도가 교육자라는 말에 걸맞았다. 내가 다닌 학교의 학과장은 2015년에도 2002년도 족보에 있던 오타가 그대로 남아있는 시험지로 시험을 보곤 했었다. 그 교수의 방은 먼지 낀 책들이 꽂힌 채, 복도식 아파트 단지처럼 늘어선 책장들로 가득했는데, 그 책장들 칸칸에는 삼성전자, 엘지전자 따위의 국내 유수의 대기업 임원들과 골프장에서 환히 웃으며 브이를 그리는 교수의 모습이 가득했었다. 반면에 그는 비대면 수업에서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퀴즈 어플리케이션로 분위기를 환기하고, 매 학기마다 어떤 시험 문제를 낼지 고민하는 등록금이 아깝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건 그의 모습에서 가장 멋있는 부분도 아니었는데, 이 작은 어촌에서 그는 여러 할머님들의 아들로서, 궂은일을 마다않고 자식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곳을 보수 한 푼 받지 않고 돕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뜯어진 문짝을 읍내에 나가 고쳐오고, 젖은 타일로 미끄러운 화장실 바닥에 할머니들이 넘어지지 않게 매트를 깔아주고 다니곤 했다. 또한 오늘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 학생을 인솔하여 스쿠버다이빙을 성공적으로 하고 왔다고 자랑스레 말했는데 그 얘기를 하며 씩 웃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 멋있어보였다.
호스트 누님도 범인은 전혀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분이었다. 홀로 상경하여 꿋꿋이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니고, 큰 회사에 입사했지만, 당시의 우리나라는 여자로서 높은 곳을 바라보며 회사 생활을 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기에 부침을 겪으며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불혹의 나이가 가까워졌을 때, 더 이상 이직을 하기에는 많은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가 나를 좌지우지 하지 않고, 내가 회사를 고르기 위한 준비였다. 폐관 수련을 하듯 공립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였고, 회계사를 따고 하산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해나가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사랑을 지금이나마 이곳에서 찾아서 키워가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잘생기고 사람 좋은 남자친구로.
처음 나에게 ‘회사에서 돈을 좀 만지는 일을 한다.’는 소개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게 회계사였다면 꽤나 짓궂은 농담은 맞는 것 같다. 좀 만진다고 표현하기에는 회계사가 관리하는 액수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사촌 동생도 역시나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꽤나 터프한 커리어를 보내고 있는 의사였다. 의사로서 가장 가치관을 흔들어놓는 요양병원에서 코로나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며 경력을 쌓았다고 했다. 돈 때문에 그런 곳을 전전한다고 했지만 단순히 돈 때문이라기엔 무척 힘들고 숭고한 커리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죽음을 상당히 자주 마주쳤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죽음은 무척 슬프고 절절하지만 현실에서는 차디 찬 죽음이 훨씬 많다. 평생 헌신을 다해 자식을 키워내고 끝끝내 방전되어 요양병원에 맡겨지는 부모들이 어떤 잔인한 최후를 맞는지, 불편한 진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곳에 있는 의사들은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하는 것이 아닌, 적절한 죽음의 시기를 조율해가며 자식들에게 과잉 진료라는 모욕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된 의사지만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애매한 줄을 타며 고통을 덜어주며 죽음을 향해 천천히 보내주는 요양병원은 사실 인간의 밑바닥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그녀에게 그 경험은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나였다면 아마 격한 근무로 육체적 한계를 절감하는 것이 자식들의 끔직한 민낯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면 내가 왜 그런 것들을 아는지 이야기를 해야 했고, 맑은 여름 하늘 아래서 묘한 눈짓을 주고받는 호스트 커플의 달콤한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이 끝나 근무 중에 겪은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풀며 다음 도약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 의사가 자기를 백수라고 소개하는 것 또한 고약한 농담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안사람들의 유전자에는 이상한 유머코드가 자리 잡고 있나보다.
자리를 끝내고, 우리는 짝을 지어 흩어졌다. 쓰레기를 버리러 형님과 사촌 동생이 밖을 나갔고 나와 누님은 남아서 설거지를 하였다. 분위기에 취해 평소보다 과음을 했던 탓인지 설거지를 하다가 기어코 접시 하나를 깨고 말았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뵐 때 꼭 접시를 하나 선물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들어와서 누워서 식사자리를 돌려보며 상념에 빠졌다. 우리 네 명은 다른 분야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삶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권위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올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수, 유복하지 못한 환경임에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결국 자리를 잡은 회계사, 엘리트주의에 빠져 서울에서 편하고 멋있는 일이 아닌, 막장 속에서 의술을 행하고 있는 새내기 의사, 매끈한 톱니바퀴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사사건건 크랙을 내고 다니며 변화를 시도하는 엔지니어.
우린 각자 자기가 정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건 일종의 순례와 같은 것이라 고되고 어려운 길이다.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고, 그렇기에 외롭다. 그래서 때로는 밤하늘의 달이 구름에 가려지는 틈을 타, 주저앉아 숨을 고를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것이다.
우린 서로의 그 잠시의 순간에 우연히 여기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