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그리우면 내게 오라

by 온가을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나무가 많았다.

꽃댕강, 철쭉, 동백나무, 벚나무와 같은 수많은 나무들 사이에서, 그 아파트에 사는 18년 동안 매 계절을 눈에 담았다. 봄이면 보조주방 창을 열어 손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의 벚꽃, 여름이면 매미소리와 푸르른 녹음, 가을이면 동 앞 감나무, 겨울이면 저 멀리 눈 덮인 산과 계절마다 인사를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서울살이를 하며 버스를 타던 어느 날, 창밖으로 나뭇잎을 보는데 감촉이 생각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져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난 자연과 멀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나뭇잎 하나를 가지고도 유심히 들여다보고, 어떤 게 제일 예쁠까 고심해서 따고 만져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돌며 연분홍 동백꽃을 보러 가고, 동 앞에 가득한 철쭉을 따서 꿀을 쪽쪽 빨고, 콩벌레를 관찰하고, 토끼풀과 이름 모를 열매를 손에 쥐고 집에 돌아왔다.


놀이터 한 구석에서 흙냄새를 맡고, 꽃잎을 돌로 찧고, 소꿉놀이하던 때에는 매일 보는 나뭇잎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버스를 타고 가며 우연히 본 나뭇잎은 내가 자랐다는 걸 깨닫게 했다.


햇빛을 받으며 뛰어다니고 손이 더러워져도 '아무렴 어때'하던 그 시절.

흙을 만지고 느끼며 자전거 하나로 꽃놀이하러 다닐 수 있었던 그날들이 아주 소중했던 시간이라는 걸, 어릴 땐 매일 보던 나뭇잎의 무늬와 촉감이 어색해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담아둔 기억들은 이제 내게 낭만이 되었지만, 우연히 마주친 나뭇잎 하나에도 떠올릴 추억이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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