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용기는 아닐지라도

자취 3일 차

by 온가을

대학생이 된 첫날이다.

인간관계에 너무 애쓰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학교에 갔다. 1교시는 과 동기들이 모두 다 큰 홀에 모여 듣는 강의였다. 통로 쪽 자리에 앉고 싶었는데 내가 늦은 모양인지 이미 다른 학생들이 선점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별로 없는 줄에, 적당히 말을 걸 수 있을 만한 동기가 있는 자리를 살펴보다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내 옆자리로 사람들이 와서 앉았는데,

아뿔싸. 자리를 잘못 잡았다.

양 옆으로 다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앉아서, 내가 말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급해하던 와중에 '그래, 너무 애쓰지 말자 그랬잖아' 하는 위안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그렇지, 자연스럽게 하면 돼.

이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익숙하다.


첫 수업은 오티라서 30분이나 일찍 마쳐졌다. 집에 가서 잠깐 쉬다 점심을 먹고는 다음 강의동으로 향했다.

강의실 문에 붙여진 자리배치도에 모두 띄엄띄엄 앉으라는 식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쩝, 오늘은 누군가와 친해지긴 어렵겠다' 하며 자리에 가 앉았다.

수업 시작을 기다리는데 동기 한 명이 내 쪽으로 오더니 옆 자리에 앉았다.

수업 끝나는 타이밍에 말 걸어 봐야지 하며, 수업 시작도 전에 마치기를 기다리게 됐다.


오늘은 오티니까 교수님이 서로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하셨다.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대학교에서도 자기소개를 하다니!

그러면서도 이때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나 하는 생각에 설렜다.

다른 동기들의 자기소개를 듣는데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자기소개를 편견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내 차례엔 무지 떨렸지만 그래도 밝게 소개했다. 이미지 메이킹 성공일까?


다음은 옆자리 동기 차례였다. 열심히 들으며 속으로는 떨었다. ‘자기소개 끝내면 친하게 지내자고 악수해야지, 악수해야지' 하면서 기다리다 용기를 내서 수줍게 접힌 손가락을 내밀었다.

동갑이길래 말도 놓고 번호도 교환해서 다행이었다. 엄청난 용기였다.


그렇게 동기와 말 트기를 성공하고 강의실을 나서려고 하는데 동기 두 명이 보였다. 아직 나가지 않고 강의실 뒤쪽에서 머뭇거리고 있길래 말을 걸었다.

다들 아직 친구들이 없다길래 서로 반가워하며 인스타를 맞팔했다. 셋 다 다음 수업이 없길래 내가 카페라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이렇게나 적극적인 내가 오랜만이라 나도 좀 당황했다.


내 안에서는 아무래도 두 자아가 싸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적극적인 내가 우세한 게 반가웠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카페도 가고 얘기도 하는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싫진 않았다.

대화하다 자연스럽게 mbti얘기가 나왔다. 동기들 모두 내가 E라는 사실에 고갤 끄덕이며 공감하더라.

내가 대문자 E인 척하는 소문자 e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다. 나도 떨면서 용기를 낸 거였는데, 그렇게 보였음 다행이다.


학창 시절 때 내가 느낀 게 있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남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

자신을 감추고 소극적으로 살았던 중고등학생의 나를 지우고 싶었기에 오늘 노력했다. 처음 본 친구들이 나를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사람으로 봐주는 건 내가 '나 자신은 적극적인 사람이야' 하며 행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오늘 인사한 세 명의 친구 모두, 내가 말 걸기까지 얼마나 떨었는지,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는지는 모를 거다.

이게 실제로도 작은 용기가 될 만큼 내가 더 큰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사소한 용기를 내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

한편으론, 어릴 땐 낯가림을 모르던 애가 이젠 큰 마음을 먹어야 말 걸어볼 수 있게 된 것이 짠하기도 하다. 이건 자연스러운 걸까 아님 여태 상처 입은 걸까.


아 참, 그리고 오늘 또 용기를 낸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테니스 소모임 지원. 계속 눈여겨보고 있던 테니스 소모임 공지를 보며 저녁에 지원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내가 지원하기로 마음먹은 30분 전에 마감되었다는 댓글이 올라와있었다.

우르르 쾅쾅. 마감되었다고 하니까 괜히 더 하고 싶어졌다.


저녁에 엄마와 통화하며

"마감된 거 모르는 척하고 그냥 문자 해볼까 봐." 했는데

"모르는 척하지 말고 솔직하게 너의 사정을 얘기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말에 '에잇, 그래보지 뭐.' 하고는 나의 솔직함을 담아 연락했더니 흔쾌히 가능하다는 답장이 왔다.

고민한 것치곤 단숨에 가능하다는 문자가 와서 놀랐다.

별것도 아닌 것에 고민했네, 그냥 연락해 보길 잘했다.


저번 글에서 지나친 신중함보다 단순한 결정을 따르자고 썼었는데 진짜 오늘은 '에잇, 그러지 뭐' 하면서 무작정 저지른 용기에서 좋음을 발견했다. 물론 대학교라는 새로운 공간이기에 더 과감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해낸 건 해낸 거다.


오늘 나는 먼저 다가갔고 인사할 수 있는 동기 몇이 생겼다.

나에게 진짜 필요했던 건 계산이 아니라 감정을 따르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입시기간 동안 내가 나의 감정을 마냥 따라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땐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 건지, 무엇이 적합한지 생각하며 재기 바빴으니까.


무계획은 여전히 나에게 쉽지 않은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무작정,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가지는 마음이 오늘처럼 예상치 못한 기회를 가져다준다면, 충분히 그 마음을 따라볼 가치가 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옳은 것에 대한 확신, 통상적인 좋음이 아니라 솔직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였음을 느낀다.


얼마 전 진로글쓰기에서 나에게 가장 크게 박혔던 말이 있다.

선생님께서

"가을님은 중고등학교 생활에서 나를 드러낼 수 없었다, 나를 드러내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하시네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를 드러내는 건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 아닌가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머리를 댕 하고 맞았다.


오늘과 연결시켜 보면 나는 상황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했던 거였다.

용기, 나하고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난 생각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 덕에 내가 원하던 대로 나를 발현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오늘 사귄 동기들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자연스레 멀어질 것을 어느 정도 이미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경험을 회상해 보면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원래, 맨 처음 사귄 친구와는 그리 친해지지 않더라고.

그래도 나는 오늘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새로 사귄 인연보다 그 순간 주저하지 않았던 나에게 집중하고, 스스로를 응원하는 게 장하다.


나에겐 힘이 있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방법만 찾자.

타인과 상황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되 나의 것은 그냥 한번 해보는 거다.

새로움 앞에 겁먹지 않는 나를 마주하지 않았던가.

앞으로의 날들에 용감할 수 있길 바라고, 또 오늘의 나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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