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6일 차
5일 차는 생략하고 6일 차 글을 쓴다.
어제 늦게까지 아는 언니와 시간을 보내다 집에 와서는 노트북을 펴놓은 채, 잠들어 버렸다. 내일은 드디어 서울 오빠집으로 올라가는 금요일이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바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올라갈 예정이다.
자취방을 비우려니 어중간한 상태로 가는 건 싫어서 아직 봉투에 다 차지도 않은 쓰레기를 묶어서 버렸다. 빨래도 돌리고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이나 할 일들은 메모지에 적어서 구체화시켰다. 집안일을 끝내곤 갤러리를 열었더니 얼마 전 캡처해 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잘하려고 하지 마, 그냥 해'
며칠 전 예능에서 이 문장을 보고는 좋아서 저장해 두었다.
모 개그우먼이 과거에 유명방송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큰 나머지 긴장을 엄청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스스로 '잘하려고 하지 마, 있는 그대로 해'라고 주문을 외웠는데, 실제로 엄청 못했다고 한다.
엔딩이 너무 의외기도 하고 웃겨서 한참을 돌려봤다. 원래 주문을 외워서 실제론 너무 잘했다더라, 이런 결론이 일반적인데 엄청 못했다고 하니 인간적이어서 좋았다.
'잘하려고 하지 마, 그냥 해.'라는 말은 결과가 꼭 성공적일 필요는 없다는 걸 담고 있다.
내게 필요한 말이라서 저장해 두곤 요즘 자주 읽는다.
읽을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예상한 결말이 아닌데 오히려 위로가 된다. 실은 그런 결말이 더 자연스러운 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겐 잘하고 싶은 욕심이 원동력이었다.
잘한다는 것은 대부분 결과로 증명되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집착했는데, 이 이야기처럼 엄청 못한 결말도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걸 생각하지 못했다. 내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겠거니 했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데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잘한다'에 집착하는 순간, 잘하지 못한 모든 결과는 날 무너지게 한다.
"잘하려고 하지 마, 그냥 해."
무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큰 응원이 담겨있다. 결과보단 용기 있는 도전에 초점을 맞춘 응원이자 못해도 괜찮다는 위로였다.
'못해도 어쩌게. 잘하려고 하지 말라며.'
어떠한 커다란 기대나 부푼 희망 없이 단지 과정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 그런 사람이 야말 진짜 속으로 열정적인 사람이 아닐까. 얻어낸 결과로써야 열정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속으로 타오르는 열정을 가진 사람.
오늘 해리포터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다.
영화에서 해리는 우연히 학교 구석에서 거울 하나를 발견하고 그 거울에 비치는 부모님을 만난다. 영화 속 거울은 사실 거울을 보는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 이뤄진 모습, 즉 허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매일 밤 해리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볼 수 있는 거울을 찾아가고 이 모습을 발견한 덤블도어는 해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이 거울에서 현재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본단다.
이 거울에선 지식이나 진실을 얻을 수 없고, 사람들은 거울 앞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때론 미치기도 하지."
그리고 덤블도어는 해리에게 다시는 거울을 찾아오지 말 것을 당부한다.
몇 년 전엔 이해가 가질 않던 대사였는데 오늘은 큰 울림을 얻었다.
내 앞에 그 거울이 있다면 원하는 결과를 모두 이뤄낸 모습이 나타나겠지.
해리포터에서는 거울을 찾아오는 해리와 거울을 숨기는 덤블도어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원하는 모습에 취해있는 해리와 해리를 위해 거울을 숨기려는 덤블도어가 모두 존재한다.
난 늘 거울을 찾아가 원하는 모습을 보고는 목표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이루지 못하면 마음엔 천둥번개가 쳤다. 잘하려는 마음은 큰 원동력이지만, 한편으론 허상 같은 미래에 의존하는 연약함이기도 하다.
당연히 나타날 수 있는 아쉬운 결과가 생겨도 잠깐 속상하고 말 걸.
물론 거울에 의지하며 견뎌온 내가 대견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태 이루고 싶은 결과만 보며 스스로 다독이지 못하고 채찍질만 해온 세월이 안쓰럽기도 하다.
"너 자신에게 잘해왔다고 좀 해줘"라는 말을 들을 땐, 뭘 했다고 그런 말을 해줘야 하나 싶었는데 이젠 조금 알겠다. 거울에 보이는 허상 같은 결과만 보느라 마음을 쓴 나를 안아주라는 의미였다는 걸.
잘하려는 마음을 품되, 충분히 애쓴 내게도 토닥여줄 수 있기를.
내 마음속의 덤블도어가 거울을 치워도, 나의 해리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단단한 아이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