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이별

여름 : 혹독한 이별의 계절

by 자유지은


후덥지근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의 퇴근길. Y는 평소처럼 지하철로 직행하다 말고 발길을 돌려 꽃집으로 향했다.


"수국 한 다발만 주세요."

"선물하실 거예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포장해주세요."


포장을 기다리며 둘러본 가게 안에는 색색깔의 다양한 꽃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이 머무는 꽃들마다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샛노란 프리지어의 싱그러움이나 분홍 장미의 우아함이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인 것처럼 저마다의 향기를 품고 있는 꽃들. 그래도 왠지 여름의 끝자락엔 수국이 마음을 끈다.


잠시 후, 예쁘게 포장된 꽃을 건네받은 Y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작고 여린 꽃잎들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 너머에서부터 보드라운 향이 몸에 퍼져 마음이 한결 밝아지는 느낌이다. 꽃이 생기를 잃기 전에 얼른 집에 가서 꽂아놓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친구와 약속이 잡혀있었다. Y는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친구 J와 만나기로 한 곳은 경복궁 뒤쪽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레스토랑이었다. 얼마 전 서촌에 대한 기획 취재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음식 맛도 괜찮고 분위기가 편안해서 이 근처에 올 일이 있을 때마다 찾게 되는 집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던 J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이야~ 오랜만이다.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너무 바쁜 척하는 거 아니야?"


Y가 가방과 꽃다발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기도 전에 J의 말들이 빠른 속도로 귓속을 파고들었다.


"미안해.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봄에 보고 못 봤으니까 서너 달은 된 거 같은데?"

"생각보다 오래됐구나.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Y가 미안한 투로 말끝을 흐렸다. 때마침 J가 미리 주문해 놓은 음식들이 나왔다. J는 요즘 먹스타그램에 푹 빠져 있다. 한동안은 당일치기 여행에 재미를 붙이는가 싶더니 요즘은 야근이 잦아 도저히 할 수가 없다며 식도락으로 스트레스 해소를 대신하고 있다고 했다.


J는 식사를 하며 못 본 사이에 겪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의 풀스토리를 모두 털어놓기 바빴다. 하지만 딱히 위로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길고 긴 이야기를 계속하던 J가 입을 오므린 채 뭔가를 생각하더니 Y에게 물었다.


"아 맞다, 너 소설 쓴다고 했지. 잘 돼가?"

"아니. 요즘 통 못 쓰고 있어."

"왜? 그렇게 바빠?"

"그런 건 아닌데... 지금은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시기야."

"왜?"

"……."


계속되는 J의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찾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Y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야기에도 유효기간이 있으니까."

"그치, 그치. 어떤 글이든 제일 잘 써지는 타이밍이 있긴 하지."


J가 고개를 끄덕 거리며 수긍하는 듯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니지 않아? 무슨 일 있어?"


Y는 파스타면을 돌돌 말며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그리고 작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아직 이별하는 중이라, 사랑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어."


순간 J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둘 사이에 짧고도 긴 적막이 감돌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Y였다.


"아직 내가 내공이 부족해서 그렇지 뭐."

"그렇다고 너무 묵히는 것도 안 좋아."

"잊어버렸나 본데, 나는 아직 이별하는 중이라니까? 난 이게 완전히 정리되지 전에는 작가로서 글을 지어낼 수가 없어. 아무리 숨겨보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진심이 담겨버리니까."

"너도 참 어렵게 산다. 헤어졌으면 끝인 거지. '이별하는 중'은 또 뭐니?"

"왜? 연애 중이라는 말은 잘도 쓰면서, 이별하는 중이라는 말은 쓰면 안 돼?"


Y가 다소 격앙된 어조로 반박하자 이번엔 J가 한 템포 숨을 죽였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한테는 어떤 감정이나 추억을 안전하게 저장하는 과정이 중요해. 뜨거워진 유리를 찬물에 넣으면 바로 깨져버리지만 그냥 서서히 식히면 멀쩡하잖아. 나중에 상처가 덧나지 않으려면 연고를 열심히 발라야지..."


Y의 말이 끝나자 J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고... 사랑이 대체 뭔데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거니?"

"그러게 말이야. 사랑은 너무 어렵고, 이별은 사랑만큼 뜨거워."


Y의 말에 J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날도 더운데 비나 확 쏟아졌으면 좋겠다."


J의 말처럼 일기예보엔 많은 비가 예고되어 있다. 비가 그치고 나면 Y에게만큼은 유난히 뜨거웠던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수국의 꽃말은 '진심'과 '변덕'입니다. 다소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니 의아한 일이죠?
여름에 피는 수국은 조금만 건조해져도 쉽게 말라버리기 때문에 시든 것처럼 보이지만, 물속에 한 시간만 담가 두면 금세 생기를 되찾는 꽃이랍니다.




소심한

작가의 변명


너무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이번 브런치의 발행 버튼을 누르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도 혹시 제 소식을 기다리셨던 분이 있다면,

잘 살아있다는 인사드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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