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오피스 와이프
내 트라우마와 남편과의 이혼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에도 며칠은 계속 생각만 했다. 도대체 왜일까?
아빠가 나를 죽도록 패는 바람에 다행히도 질질 끌기만 하던 엄마 아빠의 이혼이 이루어졌고, 그 뒤로 한동안 아빠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 없이 그저 죽은 사람처럼 여기며 내 인생을 똑바로 살기 위해 몰두했다. 트라우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면 일부러 기억을 지우고 산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준비하면서,
너무나 따뜻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란 남편을 만나면서 스스로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결혼식에 들어설 때 아무도 내 손을 잡아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보다는 구색이라도 갖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나의 결핍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분명 철이 없어서였을 테지. 그래서 결혼식 전에 몇 년 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결혼하는데 혹시 결혼식에 같이 들어가 줄 수 있냐고. 아빠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에게 미안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대로 아빠는 변함없이 아빠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변함없는 사실을 왜 바보처럼 망각하고 그런 전화를 했는지. 재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사실 이 일은 나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았다.
첫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보니 세상이 다르다. 엄마가 되기 전의 삶과 엄마가 된 이후의 삶은 살아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다르고 깊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을 바라볼 때의 그 환희와 행복은 웃음으로는 부족하다. 웃으며 울게 된다. 자식을 향한 사랑은 느껴보지 않고서는 형언할 수 없다. 가만히 자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데 너무 귀하고 소중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이 아이를 향한 내 사랑과 책임감 그리고 삶의 의지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부모에게 주어지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아이 자체가 아니라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
그런데 첫아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울고 있는 순간,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분명 이런 존재였겠지, 나를 무참히 때리고 짓밟고 버린 아빠에게도, 한평생 고된 노동으로 사랑을 대신한 엄마에게도 나 역시 소중한 아기였겠지. 나를 보고 엄마 아빠도 눈물 흘리고 웃음 지었겠지. 그런 생각.
사실 아빠의 외도는 엄마에게만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아빠가 퇴근하기만 기다린 우리 삼 남매에게도, 아빠의 진한 스킨 냄새가 남은 빈자리는 공허했고 외로웠다. 그저 모른척해야 했고 그게 엄마를 덜 슬프게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한 번도 내색하지 못했지만 아빠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고 소중한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늘 갈망했다. 그래서 아빠를 원망하기도 했고 저주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를 지켜달라고.
지나고 보니 어린 시절 내 마음속이 너무 투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그리고 버려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누군가에게서 외면당하거나 버려지거나. 잊혀지거나. 유기 공포.
이렇게 내 트라우마를 적고 보니, 왜 내가 남편의 이혼이라는 말 앞에 한없이 무너졌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