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 사이

당신의 이야기

by 뚜솔윤베씨

이사 오고 나서 가장 좋았던 건

오늘 오전 설거지 할 때 정수리를 간지럽히는 가을바람이라고 기록하고 싶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더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쳐있던 마음을 위로한다. 정말 이 계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위로의 바람이다.


이사 한 집 주방엔 싱크대 앞에 작은 창 하나가 있다. 매일 아침 홍초 한 잔을 마시며 이 창 밖으로 지나는 차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세상과 나 사이에 작은 창 하나.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오늘은 드디어 윤성이가 새로운 어린이집 등원을 했고 적응 기간이라 11시까지 데리러 가면 된다. 아침 일찍 국어노트 두 권을 사서 등교한 윤솔이를 떠올리며,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있을 윤성이를 생각하며 정말 오랜만에 침묵 속에서 아이들이 먹은 아침밥그릇을 씻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수저도 닦고 접시도 헹구고 있는데 시원한 가을바람이 그 작은 창으로 들어와 내 정수리를 간지럽힌다. 그 느낌이 얼마나 소중한지 고개를 들어 두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창 밖으로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웃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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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나는 요가원과 서울집을 정리하고 남편이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남편이 있는 부산이라기보다는 아이들과 내 가족이 있는 곳이 결국에는 나의 집이라는 생각을 했고, 지금은 후회 없이 새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기록을 위한 시간조차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혹시나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이 순간을 영영 잊고 살면 어쩌지 애가 타기도 했는데 오늘은 다행히 아침에 마주한 바람도 기록할 겸 시간을 내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벌써 가을이다.


저녁 요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불 꺼진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왔다. 저녁이니 시원한 바람이 불까 싶어 방 창문을 열면서 생각했다. 성숙이란 건 도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고통받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다른 표현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스쳤다. 아픔의 결과물이 왜 상처가 아니고 성장이고 성숙일까 지금 나는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괘씸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음이 뾰족한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오늘은 부산에 이사 온 지 열흘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하루였다. 소위 엄마로서 아내로서 내 할 일을 야무지게 다 마무리 지은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윤윤이들의 아침을 건강하게 챙겨줬고, 그전에 더 일찍 일어나 샤워에 화장에 앞머리 롤까지 말고 외출복에 향수도 뿌렸다. 요가원 출근할 때랑 다름없이 준비를 마쳤고 준비물인 열 칸짜리 국어 노트가 없다고 걱정인 윤솔이를 데리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 국어 노트 2권을 사서 지각없이 등교도 마쳤다.


어린이집 대기자가 너무 길어 영락없이 내년 유치원 가기 전까지 가정보육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윤성이도, 때마침 가깝고 좋은 어린이집에 자리 하나가 나서 오늘 첫 등원을 했다. 새로 받은 어린이집 가방에 물병도 넣고 여벌 옷도 챙기고 누나가 쓰던 시크릿 쥬쥬 휴대폰도 넣고 씽씽이를 타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가르며 길을 건넜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신난 윤성이를 보내고 뒤돌아 집에 돌아오는데 갓 태어나 걸음마를 연습하는 새끼 기린처럼 두 다리가 휘청인다. 이 바람이 뭐라고 양옆에 윤솔이 윤성이가 없으니까 자꾸 휘청이게 된다. 에코백을 오른 어깨에 걸어도 허전하고 왼쪽 어깨에 걸어도 허전하다.


새 집에 혼자 있기는 또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얼른 설거지도 마치고 어제 만든 짜장에 밥도 한 그릇 비웠다. 빨래도 돌리고 빨래도 개고 거실에 널브러진 퍼즐, 장난감도 정리하고 분리수거도 했다. 콩나물 무침도 만들었고 윤성이 점심이랑 윤솔이 오후 간식도 준비해 뒀다. 수영학원에 전화해 솔이 스케줄도 변경했고 윤성이 어린이집에 필요한 서류도 인쇄해 뒀다. 베란다에 있던 화분도 깨끗이 씻어 주방 한편에 뒀고 아침에 뒤집어 벗어 놓고 간 윤솔이 옷도 정리해서 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체계적이진 않지만 뒤죽박죽 섞였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들을 다 끝내고 윤성이 데리러 갈 시간에 또 바람에 휘청이며 길을 걸었다. 여전히 낯선 곳이지만 내 가족이 있는 곳이 나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이곳도 언젠가 나에게 힘이 되겠지 믿게 된다. 마음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되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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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지만 평범함 일상을 잘 이어간 오늘, 퇴근한 남편의 저녁을 차리고 아이들과 레고놀이를 하다가 저녁 요가 수업을 들으러 나섰다. 요가원을 정리한 지 이제 3주 정도밖에 안 됐는데도 요가복이 어색하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은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고 심지어 요가원 가기 전 20분 정도 여유까지 생겼는데도 유난히 기운이 빠진다. 오늘 내 몫은 다 했는데도 전혀 기쁘거나 뿌듯하지가 않은 게 이상하고 의심스러워 가만히 생각해 본다. 성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힘든 이 시간을 견뎌내면 과연 내가 더 깊고 큰 사람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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