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자다가 깬 윤성이를 다시 재우고 나왔다. 회사 송별회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윤성이 옆에 가서 자라고 말하곤 컴퓨터를 켰다. 다이어리에 적은 한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주어진 이 시간에 안도감을 느낀다.
'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며, 꼭 정리하고 싶은 게 있다면'이라고 적고 어젯밤 솔이랑 같이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던 횡단보도 앞을 떠올렸다. 달이 유난히 밝고 예쁜 날이었다. 어찌 보면 코앞이고 어찌 보면 꽤나 먼 거리인데 늘 차로만 이동하다가 어제는 무슨 마음에선지 윤솔이는 자전거를, 윤성이는 킥보드를, 나는 솔이가 타던 두발 킥보드를 타고 무용 학원에 다녀왔다. 솔이는 부산으로 이사 와 현대무용을 시작했는데 그날만을 기다리며 한 주를 보낸다. 무용 가는 날엔 친구가 통닭 먹자고 꼬셔도 꿈쩍도 안 한다. (고민은 한다) 아무튼 남편이 야근으로 늦는 밤 아이들과 이른 저녁을 먹고 장갑에 모자에 목도리에 무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언젠가 셋 다 자전거를 탈 날이 오겠지, 또 언젠가 각자 차를 몰고 어느 식당에서 모이자 하는 날도 오겠지 생각하며 부리나케 발을 굴리는 아이들 뒤를 쫓는다. 그렇게 도착한 학원 앞에서 솔이를 들여보내고 얼굴은 꽁꽁 얼음장인데 덥다며 모자며 패딩이며 벗어젖히는 윤성이 뺨에 뽀뽀를 해댄다. 우리 윤성이 씽씽이 너무 잘 탄다고 누나 쫓느라 이 한 겨울에 땀이 난 둘째 윤성이 궁디를 팡팡해준다. 너무 멋있다고. 다행히 야근을 끝내고 솔이 학원 앞으로 온 남편 차를 타고 윤성이는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조금 기다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솔이와 함께 집으로 왔다.
신호를 기다리며 하늘을 보는데 달이 너무 예쁘고 밝아 마치 소원을 비는 요술램프 지니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솔이에게 딱 소원 빌 타이밍이라며 말 끝나기가 무섭게 두 손 모으고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다. 옆에 솔이가 있다는 것도 잊고, 지금이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저 '본연의 나로서 살아가게 해주세요'라고 두 번 속삭였다. 눈을 뜨고 솔이 눈을 마주치는데 따란_
그 타이밍이다. 소원 커밍 아웃 타임.
솔이가 먼저 엄마 무슨 소원 빌었냐고 묻는데 본연의 나를 어떻게 설명할까, 그리고 왜 그런 소원을 빌었는지 어떻게 설명할까 짧게 고민하고는 새침하게 비밀!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솔이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으니 두 개를 빌었다고 했다. 하나는 평범한 거고 하나는 내가 원하는 거라고. 평범한 거는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달라는 소원이었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뿔싸 나는 가족 따위(?) 잊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소원을 빌었는데 솔이 소원 앞에서 의문의 패를 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진짜 궁금한 두 번째 소원을 묻자 요 녀석이 마치 내가 조금 전에 지었던 표정으로 비밀!이라고 새침을 떨며 커다란 앞니 두 개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두 번째 의문의 패.
지난여름 통도사에 놀러 갔을 때가 떠오른다. 연못 한가운데 동전을 던지면서 그때도 소원을 빌었는데 그때 솔이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솔이의 무해하고도 진심 어린 얼굴이 생각난다.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묻는 말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려다가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고 했다. 이 말을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띠며 그 와중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어딘가를 구경하면서 무심히 말하는데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도 나는 대웅전 방석에 엎드려 '제발 물 흐르듯 살아가게 해주세요'라고 빌었었는데 말이다.
그때 나 지금이나 여전히 위태로운 내 심신이 솔이 앞에서 새침으로 가려질지 모르겠다.
지난 수요일 두 번째 독서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서로 주고받았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며 10점 만점에 몇 점이냐고. 예능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질문도 생소한데 인간은 질문 앞에서 거절을 모른다. 서둘러 열두 달을 돌아보며 점수를 매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10점 만점에 ...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조금의 과장이나 겸손 없이 10점 만점에 10점이 나온다. 위태로운 심신으로 어디 고개만 숙이면, 두 손만 모으면 제발 나를 잃지 않고 인생을 살아갈 용기를 달라고 빌면서도 올 한 해의 나는 만점이다.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게 휘청이면서도 돌아보니 나는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고 잘 지켜냈다. 새침을 떨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윤솔이만 봐도 알 수 있다. 누나를 앞지르겠다고 한 겨울에 땀을 흘리며 씽씽이를 타는 윤성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아이들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가정을 지켜내고, 다시 어른으로 부부로 그리고 나로 살아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흠 없는 만점이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며, 꼭 정리하고 싶은 게 있다면 _나만 아는 나의 열두 달을 기록하고 수고했다고 말하기. 10점 만점에 1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