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지난주 우리 가족은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이번 여행 계획은 모두 남편이 했고 나는 그냥 군말 없이 따랐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에는 룰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베트남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여행을 가자고 한 건 나였고 계획도 내가 짰다. ( 대체로 주말이든, 휴가든 나들이 계획은 내가 짠다.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있고 남편이 안 하니 나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여행 출발 3일 전 나는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요가에 한창 빠져있을 때라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했더니 많이 피곤했는지 독감에 걸렸다. 그날로 남편과 솔이는 시댁으로 내려갔고 나는 집에서 혼자 마스크를 끼고 셀프 격리의 시간을 보냈다.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 2박 3일은 한 자리에 계속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A형 독감 3일 차, 우리는 계획대로 베트남으로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모했던 거 같다, 그 아픈 몸으로 여행을 가다니. 내 몸도 몸이지만 다른 사람 생각도 했어야 했는데, 비행기 타는 게 뭐라고 그 당시에는 죽을 동 살 둥 무조건 떠나고 보자 라는 마음이었다. 아마 보상 심리가 작용했던 거 같다. 그 해 여름 아주 힘들게 이사를 했고, 그 과정을 모두 내가 담당하면서 애를 많이 썼으니.
그런데 막상 베트남에 도착해도 나는 여전히 아팠다. 그런데 사람이 아프면 짜증이 자주 나는 건가 아니면 내가 괴팍해서 그런 건가 솔이만 잘 보고 있는 남편한테 자꾸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가자고 했지만 아내가 아파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여행 계획 좀 짜주면 어떤가, 내가 아픈 몸으로 여기저기 가자고 해야 꼭 나설 건가. 내가 암말도 안 하면 5일 내내 이 호텔에서 조식 먹고 수영만 하다 가겠네, 이럴 거면 굳이 비행기 타고 여긴 왜 왔나, 뭐라도 보고 가야지, 솔이한테 뭐라도 보여줘야지 도대체 뭐냐고!!!!!!
맨날 이래, 이사도 그렇고 여행도 그렇고 평소에도 뭐든 내가 하자고 해야만 하고, 나도 남들처럼 리드하는 남편, 척척 말 안 해도 해주는 남편이랑 살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5일 중 3일은 싸웠다. 남편은 그런 나 때문에 내내 체해있었고 그 와중에도 솔이 보느라 여행을 온 건지 머슴살이를 하러 온 건지 내내 기절하듯이 뻗었다. 그런데도 나는 짜증을 멈출 수 없어 혼자서 중얼거렸다. 다시는 너랑 여행 안 한다고, 이런 거 나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혀를 쯪쯪 찰 일이다. 아이고, 이 사람아. 뭐 그렇게 스스로 힘들게 사는지.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나도 그렇게 한 번씩 휘몰아치는 나 자신을 멀리서 바라볼 때는 부끄럽고 안타깝다. 어찌 마음이 저럴까 싶다.
그 여행 이후 나는 진지하게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때 내가 너무 지나쳐서 미안했다고, 그렇지만 나는 지금 생각해도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거 같아서 너무 싫다고. 이게 남편의 잘못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지만( 내 욕심 때문인가?) 그냥 싫다고. 그리고 제안했다. 매 해 가족 여행 계획은 격년으로 각자가 담당하자고. 그리고 상대의 계획에 아무런 코멘트 없이 그냥 따르자고.
아마, 남편의 주도성을 이끌어 내고자 한 제안이었지만 과연 이게 지켜질지, 또 매년 가족여행이 내 히스테리 여행이 되는 건 아닌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리고 올해, 작년에 베트남 여행을 내가 주도했으니 이번엔 남편 차례다. 남편은 연초부터 기대하라고 큰소리쳤지만 나는 남편을 알고 있다. 남편은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걸. 아마 내가 몇 번 쪼아대야지만 장소라도 정해질 거란 걸.
순간 스치는 생각인데, 이렇게 내가 쪼아대면 허니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없이 그냥 숙제하듯이 의무적으로 여행을 준비하겠지? ㅠㅠㅠㅠ 나도 이런 아내가 되려 한 건 아닌데 ㅠㅠ
그렇게 반복된 쪼아대기와 부푼 기대 표출로 올해 여름휴가가 드디어 완성됐다. 야호! 2박 3일 속초여행. 너무 좋다, 내 생애 첫 속초라니. 남편은 회사 일로 바쁜 와중에도 아내의 푸시를 못 이겨 여행 일정표를 완성해 왔다. 남편은 또 한 번 해내면 무한 칭찬을 요구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퇴근하자마자 일정표부터 내밀고 솔이 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일정표를 들이민다. ㅋㅋㅋㅋ 나는 대충 훑어봤다. 왜냐하면 일정을 꼼꼼히 살피면 분명 잔소리부터 할 거고 이건 싫다, 저건 별로다 이런 코멘트가 나올 테니 그냥 너무 좋다, 잘했다, 신난다, 기대된다며 넘어갔다. 여행 가는 날 아침까지도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속초라는 것 말고는 몰랐다.
그렇게 시작된 여름휴가, 우리는 2박 3일을 호텔에서 묵었고 해변에서 놀았고 해안가를 거닐었고 맛난 해산물을 먹었다. 그리고 다 같이 낮잠도 잤고, 전혀 바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남편 스타일로 여행을 짜니, 그리고 나도 기대를 하지 않으니 휴가가 휴가 다웠다. 싫은 게 없었다. 짜증 나는 게 없었다. 꼭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 게 없었다.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남편은 여행 와서 짜증 한 번 안 부리고 날 한 번 안 세운 나를 보며 연신 이번 여행은 퍼펙트하다며 우쭐댔다. 남편은 귀엽다. 그런 남편 좋으라고 나도 이번 여행이 얼마나 좋은지 자주 말해주었다. 고맙다고 :) 이렇게 잘하는 거 진작에 좀 하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고 고맙다고만 했다.
그런데 마지막 날쯤 되니, 내가 또 나로 돌아와 집안에 군기가 돈다. 한 이틀은 잘 먹고 잘 자고 놀았으니 마지막 날인 오늘 속초에 온 기념으로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어? 라면 남편을 은근슬쩍 쪼고 있는 나를 발견. 남편은 조식 먹고부터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상사에게 보고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체크아웃하고 테디베어 박물관에 갈 거라고.
' 테디베어 박물관 가기 싫어 '
정말 반사적으로, 이번 여행 처음으로 코멘트를 달았다. 테디베어 박물관 가기 싫어. 정말 가기 싫었다. 나는 인형을 좋아하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도 인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인형이 테디베어, 뭐 특별한 인형이래도 인형이니 나는 싫었다. 솔이를 위한 일정이라지만 솔이도 인형에 목숨 거는 아이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정색은 하지 말걸, 어쨌든 나의 코멘트로 우리는 속초 여행을 설악산 케이블카로 마무리 지었다. 땀이 많이 났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아마 테디베어 박물관에 갔어도 남편은 지금과 똑같이 좋아했을 테지만, 나는 케이블카 타고 내려오는데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테디베어 박물관이 아니라서. 그렇게 우리의 여름휴가는 멋지게 마무리됐다.
내년엔 내 차례다. 여행이 뭔지 본떼를 보여주겠다. 남편을 이겼다고 혼자 생각하는 건 너무 좋다. 쾌감이 든다. _ 하지만 나도 남편이 행복해하는 여행을 준비하고 싶다. 남편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니까 : ) 급 러브모드로 오늘 글은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