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오랜만에 적는 나의 이야기. 임신 18주 차, 요 며칠 소화가 잘 안돼 내내 고생하다 다행히 좋은 방법 하나를 찾아내 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레몬청에 매실진액 한 스푼 정도 넣고 따뜻하게 해서 마시면 전보다는 소화가 잘 되고 밤에 자기도 수월하다. 대신 물을 많이 마시니 안 그래도 불러오는 배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데 레몬차 덕분에 더 빤질나게 화장실을 들락날락하지만 그래도 전보다 훨씬 수월한 요즘이다.
사실 임신을 알게 된 이후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양가 부모님의 걱정 어린 기쁨과 보살핌, 챙겨주심은 이미 솔이 때 많이 겪어봐서 그런지 마음속으로는 시큰둥했다. 지금 이런 호의에 너무 기분이 업 됐다가는 출산 후 몰아닥칠 상실감이 더 클 것이란 걸. 다 부질없다는 걸 한 번 겪어봐서 그런지 아무리 양가 부모님들이 고생했다, 큰마음먹었다, 고맙다, 잘 챙겨 먹고 뭐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말들이 예전처럼 마음까지는 와닿지 않는다. 그냥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뿐.
임신 초반에 입덧 때문에 조금 고생한 것 빼고는 배가 불러오기 전까지 그리고 여전히 운동하고, 솔이랑 뛰어놀 수 있는 동안에는 변화라기보다는 마음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고나 할까? 더 풍족해졌다고나 할까? 그 정도의 변화만 있었다. 변할 게 뭐 있겠어.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남편이 말했다. 이 달 말쯤 대만으로 일주일 정도 출장을 가야 할 것 같다고, 연말엔 유럽으로도 출장이 잡혀있다고. 자기 없이 임신한 몸으로 육아할 아내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그 말을 하는데 아니 왜 나는 그 넘어 남편의 환한 미소가 보이는 거지? 살 붙이고 산 세월을 믿고 이렇게 확신하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분명 남편의 표정 뒤에 숨겨진 작은 설렘을 느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남편 잘못은 아닌데 그 순간 너무나 당황스럽게 내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또르르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그래 뭐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남편을 쳐다도 보지 않고 방에 들어와 잠든 솔이 곁에 누웠다. 그리고 대성통곡을 했다. 솔이가 깨면 안 되니 대성통곡을 삼키며 흐르는 콧물에 닦느라 애를 좀 먹었다. 한두 시간쯤 울었을 때 남편이 들어와 내 옆에 누웠고 나는 가까스로 멈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와 급하게 거실로 도망쳐 나왔다. 남편에게는 이 눈물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 새벽 내내 울다 잠들었다.
무엇이었을까? 남편 혼자 출장 가서 (육아에서 해방돼서) 샘이 나서 그랬을까? 아이를 두고서는 꼼짝도 못 하는 지금 내 상황이 한탄스러워서? 나는 한 때는 저렇게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세상을 여행하고 다녔는데 3시 반이면 땡 하고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이 상황이 억울해서? 거기다가 앞으로 태어날 둘째를 생각하면 지금 같은 생활이 영영 변할 거 같지 않아서?
모르겠다,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댔는지. 위에 던진 질문들이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거겠지. 그러면서 혹시 이게 산전 우울증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솔이를 낳고 아무도 모르고 꽁꽁 숨겨가며 버텨냈던 나의 산후우울증이 생각나면서 한 며칠을 그날 밤처럼 혼자서 울었다. 그리고는 몇 주가 지난 지금. 솔이 앞에선 울 수 없으니 어떻게 어떻게 무슨 방법을 썼는지도 모르게 나는 오후 4시면 방긋 웃는 얼굴로 솔이를 맞이했고 그렇게 내 시간들도 나도 모르게 흘렀다.
그런데 솔이가 어린이 집에 가고 운동을 마치고 텅 빈 집에 들어와 앉으면 나를 휘감는 그 쓸쓸하고 소멸되는 그 느낌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집 안이 너무 조용해 가끔은 탈출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순간순간 가족들을 위한 또 다른 내가 되었다가 다시 혼자가 되면 나는 전에 없던 무겁고 깊은 감정에 함몰되는 경험을 했다.
예전에 이렇게 우울해질 때면 어떻게 하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지 그 궁리만 했는데, 그리고 그 답을 찾아 어떻게든 다시금 일어났는데 지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떨군 내 눈빛이라도 들어 올릴 수 있을지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식욕도, 의욕도, 삶의 활기도 다 잃어버린듯한 다 잃은 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텅텅 비어 가는 나 자신을 마주할 때 나는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면서 '아, 둘째 태교는 망했구나' 싶을 때, 잠깐 들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사노 요코 작가의 [사는 게 뭐라고]. 아직 읽지 않았지만 그냥 이 책을 보는 순간 집어 들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오늘부터 이 책을 읽을 생각에 전에 없던 작은 기대가 생겨 이 글을 적는다. 나는 임신을 또다시 경험하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켜낼 분명한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읽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책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