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감기 기운으로 어린이집을 하루 쉰 솔이는 여전히 기침을 하면서도 등원을 하겠다고 했다.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소방서 견학을 가는 날이라 아직 아프지만 가고 싶단다. 그렇게 손을 잡고 어린이집에 가는 길, 공기가 상쾌하고 기분이 너무 좋아 날아갈 것 같다며 딸은 말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솔이를 보내고 오랜만(?)에 혼자가 된 오늘, 이불을 정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대학 다닐 때도 종종 우울하기도 했고 나름 근심 걱정이 많아 혼자 무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때 그 감정은 왠지 멋이 있었다. 아니 나름 청춘의 멋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라앉았을 때는 글을 적거나 사색을 하거나 하며 되려 창작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곤 했는데,
결혼을 하고 출산, 육아 그리고 전업 주부의 생활 5년 차인 지금 나는 종종 비참함을 동반한 우울감에 젖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뜨거운 눈물만 흐르는 그런 비참한 우울감. 이전과 가장 큰 차이점은 마음껏 우울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는 정말 혈혈단신 나뿐이었으니 고독도 우울감도 즐겼는데 엄마라는 타이틀을 단 지금은 일단 맘껏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감춰야 하고 또 감춰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엄마가 우울하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마 당사자에 대한 걱정보다, 우울한 엄마를 둔 아이, 남편, 그리고 그 가정의 어둠에 대해 먼저 말을 한다. 이건 일반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세상에서 내가 체감한 부분이다. 나는 우울하면 안 되는 자리에 어쩌다 보니 서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렇다. 오늘 나는 무척이나 우울하고 슬프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남편과 태교여행 문제로 다툰 뒤로, 아무런 마무리도 짓지 못하고 각자 방에 들어와 아침을 맞은 오늘까지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세상 씩씩하고 즐거운 얼굴, 신나는 마음으로 솔이와 아침을 보냈고 다시 혼자 남겨진 지금, 허락된 시간 안에서 내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기록하고 있다.
남편은 내가 여행 계획을 짤 때 너무 빡빡하고 조급해한다며 불평했다. 나는 남편이 너무나 천하태평이고 나에게 의존적이며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당장 이번 주 토요일에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도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딘지만 말고 아무런 관심도 계획도 없는 남편에게 화가 나 내가 먼저 말했다. 결국 이번 여행도 내가 다 하게 되는데, 내가 하는 일마다 왜 이렇게 태클이야? 본인이 직접 하지도 않을 거면서?
남편은 여행지를 여기저기 바꿨다가 한마디 의논도 없이 비행기 티켓을 끊고 통보한 나 때문에 여행에 대한 의욕이 안 생긴다고 했다. 둘이 저녁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곤해 기절해버리면서, 그렇다고 혼자서 적극적으로 티켓을 먼저 끊을 사람도 못되면서 아내가 이렇게 추진력을 가지고 진행했으면 따라오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면서
어제저녁은 나란히 앉아 서로 벽을 보면서 싸움 아닌 싸움을 해댔다. 언제나 우리의 다툼은 남편의 이 멘트로 끝이 난다.
" 나도 달링이 원하는데 까지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니 좀 기다려달라고 "
얼마나 로맨틱하고 이상적인 남편의 멘트인가. 그런데 이 멘트를 5년 동안 들으며 이 멘트를 듣기까지 남편은 쥐 잡듯 잡는 아내가 되어본 사람은 결국에는 알게 된다. 다투면 다툴수록, 이러한 대화가 오가면 오갈수록 만족감이 커지기는커녕, 서로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얼마나 빨리 없어지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남편은 숙제하듯. 서른 넘어 선생님과 동거를 하듯, 아니면 서른 넘어서도 부모님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 끙끙거리는 아들처럼 나를 대하고 있다. 나도 남편을 그렇게 대하고 있다.
나는 남편이 부족하기 때문에 남편을 닦달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남편이 먼저 알아서 척척 해주고 나는 헤벌레 아무것도 모르는데 최상의 시간과 대우를 받다 오는 그런 공주가 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겠지. 근데 그게 안되니 매번 총대를 내가 메고 어설프게 걸 크러쉬 흉내나 내고 있어야 하는 나 자신이 싫은 거겠지. 근데 그게 안되니 이렇게 부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타고난 기질을 못 버리고 내가 항상 먼저 나서서 쪼아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예전 같았음 더 열을 내서 남편을 쪼아대고 남편이 소화불량에 걸리든 말든, 두통에 시달리든 말든 내가 원하는 대로 무언가를 하게 했겠지만 어제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남편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긴 침묵만을 이어오다 각자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고, 화요일 아침이다.
토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데, 도저히 가고 싶지가 않다. 이 여행경비면 둘째 좋은 카시트도 살 수 있고, 조리원 비용도 부담이 덜 되고 다음 달에 정산하며 싸울 일도 없을 텐데 이놈의 태교여행, 그놈의 일 년의 한 번 해외여행이 뭐라고 이럴 지랄을 하고 있나 싶어 오전 내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하다.
모든 일정을 다 취소하고, 나 지금 이만큼 삐지고 화났으니 알아서 기어! 라며 남편의 반응을 기다리고 싶지도 않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은 듯 해 승산이 없어 보이는 패다. 아 _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황폐해져만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