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남편이 출장을 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다 같이 저녁밥을 먹고 솔이와 양치질을 같이 한 뒤,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오늘은 남편에 대한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
솔이는 언제부터인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낮잠 없이 하루를 꽉 채워 놀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오늘도 출장 가는 아빠와 인사 한 뒤 여덟 시 조금 넘어 잠이 들었다. 낮잠 없이 일찍 자는 날에는 잠투정도 없고 남아도는 에너지 때문에 뒤척이지도 않는다. 그것도 고맙다. 덕분에 나는 이른 육퇴를 하고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으니.
오늘 서울은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솔이 등원 후, 아파트 단지 앞 은행 다녀오는 길은 너무 추웠다. 가로수 뿌리를 덮은 땅이 언 모습을 보면서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내 얼굴이 그렇게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 들어 집에 오자마자 이불을 덮어쓰고 몸을 떨었다. 오후엔 콧물이 났는데 아침에 그렇게 추위를 타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약도 못 먹는데 감기 걸리면 어쩌지.
꼭 이렇게 추운 날 남편은 몇 없는 외투 중에 가장 얇은 외투를 입고 출근한다. 옷방을 지나칠 때 남편 옷 중에 이렇게 추운 날은 꼭 입어야 하는 옷이 항상 옷걸이에 덩그러니 걸려있다.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이젠 '도대체 이 남자 뭐지? ' 하는 생각도 종종 한다. 외모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건 일찍이 알았지만 이렇게 계절, 날씨 안 가리고 무조건 제일 앞에, 제일 위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옷을 입고 나가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다. 그래서 남편은 일주일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한 적도 많다. 한 번은 실수로 내 니 삭스를 남편 양말장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신고 출근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남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아내의 자격을, 내조를 운운하지도 않는다. 남편은 이 부분에서 정말 쿨하다.
돌아오는 토요일은 남편의 생일이다. 생각해 보면 연애 때나 생일 선물을 제대로 챙겨줬지 결혼하고 난 뒤로는 '아침에 미역국' 여기에만 온 정신을 쏟아서인지 제대로 된 선물을 한 기억이 없다. 몇몇 떠올려보자면 쿠팡에서 주문한 이만 원짜리 벨트라던가, 이만 원짜리 샤오미 백팩 정도? 그리고 작은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올리브영에 가서 올인원 포맨 화장품을 산 적은 있다. 살다 보니, 바로 옆에서 살다 보니 선물을 할 때 주로 꼭 필요한 것들로 사게 되고 내 생활비 내에서 지출하다 보니 아주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선물들이 주를 이뤘다. 연애 때는 나도 안 써본 고가의 명품 향수나 지갑 선물을 하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지금 우리 부부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사치를 동반한 로맨스'가 있었다.
올해 생일에도 나는 생각했다. 이번 겨울에 잘 끼던 장갑을 얼마 전에 잃어버렸으니 새 장갑을 하나 사면 되겠구나 _ 이 이야기를 하자 남편은 '제발 그것만은 안돼'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퇴근길, 남편은 투명한 비닐봉지에 다 분해된 시계 하나를 담아왔다. 애플 와치. 남편 회사의 사장은 대만인인데 그 대만 사장이 쓰던 애플 와치를 이 차장에게 물려줬고 이 차장이 물려받아 쓰던 걸 다시 남편이 받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 애플 와치라는 게 언뜻 봐서는 시계인지 애들 조립장난감인지도 모르게 형편없이 분해되고 망가져있었다. 남편은 그걸 고쳐서 써보겠다고 기분 좋게 받아온 것이다. 가슴이 찢어진다.
남편은 애플 와치가 갖고 싶었던 것이다. 한 겨울에도 한 여름옷을 5일씩 입고 다니고, 빨아놓으면 똑같은 속옷을 일주일 내내 입고 다니는 사람이, 신발은 서울 온 지가 벌써 3년째인데 주야장천 그것만 신어서 비가 오면 양말이 다 젖고_ 물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람이 당장 버려도 전혀 안 이상한 애플 와치를 비닐봉지에 담아왔다는 게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남편은 애플 와치가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생일 선물은 애플 와치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검색해보니 무슨 시계가 그렇게나 비싼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내 가슴을 저렇게 후벼 파는 남편의 비닐봉지를 차마 보고만 있을 순 없어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애플 와치를 찾아보고 있었다. 남편에게 이 이야길 하니 자기는 그렇게 큰돈을 쓸 수 없다며 (생일이라고 생색내기가 부끄러워서인지) 차선책으로 선물을 골랐다. 샤오미 스마트워치 어메이즈 핏 버지. 갑자기 애플에서 샤오미로 넘어가자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결혼 5년 차 다시금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남편이 출장을 간 오늘, 드디어 주문을 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쓴다. 이번 주말엔 솔이와 같이 남이섬에 놀러 갈 생각이다. 생일 기념 남이섬 여행.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