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우산을 쓴 달팽이

오랜 장마를 이겨낸 우리

by 불완젼

01.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기나긴 여름 장마였다.

뉴스에서는 장마전선이 일주일은 더 지속될 것이라며 우비를 입은 기상캐스터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거센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솨아아아-


​눈을 감고 있으면 바닷속에 잠긴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방 한구석에 널어둔 빨래는 며칠째 습기를 머금어 눅눅했다. 나는 그중에서 그나마 덜 축축한 티셔츠를 하나 골라 입었다. 신발은 어차피 다 젖을 테니 편한 샌들을 신었다.


​아파트 1층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빗물과 모래 알갱이들이 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발가락에 닿았다.


이런 폭우 속에서 우산은 무용지물에 가까웠지만,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다니면 뉴스 자료 화면에 '장마철 시민'으로 찍히기 딱 좋을 테니 예의상 우산을 펼쳤다.


​내가 일하는 곳은 걸어서 15분 거리의 편의점이다.

내 나이 삼십 대 후반. 점장도, 매니저도 아닌 최저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래도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출근한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반년...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장수생이었다.


축축하고 우울한 장마철에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그냥 반년 전의 나는 우울한 공시생이었고, 지금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일하는 노동자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잡념 속에 걷다 보니 편의점에 도착했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02.

"왔어? 장마철이라 그런지 손님이 영 없네."


​점장은 우리 엄마 또래의 평범한 아주머니였다. 아들이 마늘 까기 같은 부업 말고 편한 편의점이나 하라며 차려줬다고 했다. 편의점이 더 힘들지 않나? 알바 관리에, 발주에, 재고 관리에...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갔지만 그들만의 '편함'은 다른가 보다 하고 넘겼다.


​"얘, 우산 다 떨어지면 창고에서 꺼내 채워놓고... 바닥에 깐 상자 너무 젖으면 새걸로 갈고... 또 뭐 있더라..."

​점장은 할 말을 쥐어짜 내듯 곰곰이 생각했다.


​"당분간은 우산 손님이나 있을 테니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하다 교대해라. 수고하고!"

​점장은 쾌활하게 웃으며 빗속을 뚫고 주차장 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안녕히 가세요"라고 작게 웅얼거리고 일을 시작했다.


​담배 재고 파악, 바닥 물기 닦기, 시재 점검, 유통기한 확인... 익숙한 일들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갔다.


평소 같으면 하교한 꼬마들이나 급하게 장 보러 나온 주부들로 붐볐을 테지만, 장마 탓인지 편의점은 적막했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째깍, 째깍."


​벽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할 일이 없어 CCTV 눈치를 살피다 핸드폰을 거치하고 드라마를 틀었다. 점장은 편하게 하라지만, 약속 없는 날엔 CCTV를 자주 확인한다는 걸 알기에 적당히 눈치를 봐야 했다.


​"똑똑."


​드라마에 너무 몰입했던 걸까. 인기척도, 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누군가 계산대를 손등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비에 흠뻑 젖은 여자가 서 있었다.

​맑고 검은 눈동자. 피부는 빗방울이 투과될 것처럼 창백하고 하얬다.

비를 머금은 듯 촉촉한 그녀의 눈을 멍하니 몇 초간 바라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 네, 어서 오세요.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03.

여자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산은... 저기 있는 게 다인가요?"


​여자가 우산 매대를 가리켰다.


손님도 없겠다, 괜한 친절을 베풀고 싶어 계산대 밖으로 나가 우산 매대를 뒤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물론 발주 넣은 우산 종류가 저게 전부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네, 편의점 우산은 이게 다인데... 혹시 찾으시는 우산이라도 있으세요?"


​"아... 음..."


​여자는 뜸을 들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시선을 아래로 떨군 탓에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을 치켜뜨며 생각했다. 내 속눈썹도 저렇게 길었나?


​-딸랑-


​"여기 담배 하나 줘요."

​"네네!"


​한참을 고민하는 여자를 뒤로하고, 담배 손님을 받기 위해 허둥지둥 포스기 앞으로 달려갔다.


​"4,500원입니다."


​계산을 하면서도 온 신경은 우산 매대 앞의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왜일까. 그냥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들고 온 우산이 고장 났나? 아니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어서 저러나?

​여자는 우산은 사지 않고, 한참 동안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04.

얼마 후, 여자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신이 들고 온 우산을 펼쳐 편의점을 나갔다.

우산이 있는데 왜 우산을 찾았을까? 장마가 길어진다니 예비용으로 사려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남은 근무 시간을 때웠다.


​오후 교대 근무자는 오늘도 5분 늦게 도착했다. 화내기도 애매하고, 넘어가기엔 짜증 나는 딱 5분.


​"형 죄송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차가 막혔어요."


​비 안 오는 날에도 늦었잖아, 라는 말을 꿀꺽 삼키고 인수인계 사항만 전달했다.


​"비 오니까 바닥 물기 잘 닦고..."

​"형 고생하셨어요. 조심히 가세요!"


​나는 우산을 펼쳐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녀석은 내가 나가자마자 의자에 앉아 게임을 켰다.

​오후가 되자 빗줄기가 더 굵어졌고, 샌들 사이로 들어오는 빗물이 제법 차가웠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들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공원 잔디밭 위, 아까 그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05.

그냥 지나쳐도 됐을 텐데, 호기심이 발목을 잡았다. 나는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그림자가 드리우자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아... 아까 편의점 알바생인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 해서..."


​말도 안 되는 오지랖이라 생각했지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 네. 우산 사지도 않고 질문만 해서 죄송해요."


​빗소리에 묻혀 여자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는 빗물처럼 투명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여기 아주 작은 달팽이가 있는데, 빗물이 너무 세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어서요."


​여자의 시선 끝에 아주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본 뒤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껍데기가 투명할 정도로 어린 달팽이였다.


​"그래서... 얘한테 씌워줄 수 있는 작은 우산이 있나 해서 편의점에 갔던 거예요. 이상하죠?"


​거센 빗소리 때문에 라디오 잡음처럼 들렸지만, '이상하죠?'라는 물음만큼은 또렷하게 박혔다.


​여자의 말대로 달팽이는 폭우 속에 고립되어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우산이 필요할까? 그냥 손으로 들어서 안전한 풀숲으로 옮겨주면 될 일 아닌가?


​"혹시 징그러워서 못 만지시는 거면, 제가 옮겨드릴까요?"


​내가 해결책을 제시하자 여자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직 어려서 주변에 어미 달팽이가 있을 수도 있고... 사람 손을 타면 달팽이가 달팽이가 아니게 돼요."


​사람이 만지면 달팽이가 아니게 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렇다고 이 장마가 끝날 때까지 저러고 있을 셈인가?



​06.

문득 옛 기억이 겹쳐 보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나는 집과 독서실만 오가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몇 년째 낙방하는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지쳐갔다. 그들의 눈치를 보기 싫어 새벽같이 나가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건물 청소를 하며 생계를 꾸리시던 어머니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어느 날부턴가 나보다 일찍 일어나 내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넣고 따뜻한 도시락을 챙겨주셨다.


​'이런 거 안 챙겨주셔도 돼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공부하느라 힘든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어머니의 정성을 합리화하며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내 이름은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실패작' 취급하며 철저히 무시했다. 어머니만이 나를 다독였지만, 그 위로가 오히려 화가 났다. 차라리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어머니가 헌신할수록 나는 더 비참한 실패작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진짜 실패작이 되어 반년을 방 안에 틀어박혔다. 어머니가 문 앞에 밥상을 차려두면,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밥만 먹고 그릇을 내놓았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하며, 언젠가 누군가 나를 이 구렁텅이에서 꺼내주겠지, 내가 고생한 걸 알아줄 은인이 나타나겠지... 썩어빠진 요행만 바라고 있었다.



​07.

"이 아이가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자의 목소리가 내 회상을 깼다.

"하지만 지금 빗줄기는 이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니까... 딱 그 정도만, 견딜 수 있을 정도만 해결해 주고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도와주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딱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그녀의 태도에서 왜 내 지난날이 보였을까.

​추위에 떨고 있는 여자의 어깨를 보자 마음이 급해졌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빗속을 뚫고 편의점으로 달렸다.


​"어? 형, 뭐 두고 가셨어요?"

​게임을 하던 알바생이 놀라 일어났지만 무시하고 창고로 직행했다.

먼지 쌓인 구석, 지난 시즌 재고 박스를 뒤졌다.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손끝에 플라스틱 감촉이 닿았다. 찾았다. 나는 물건을 움켜쥐고 다시 공원으로 뛰었다.



​08.

내가 방에 갇혀 있을수록 부모님의 다툼은 잦아졌다.


​"당신이 오냐오냐하니까 애가 저 모양이 된 거 아냐!"

"쟤도 힘들 텐데...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기다린다고 될 놈이 아니잖아! 언제까지 끼고 살 건데!"


​방 안에서 들려오는 고성에 나는 헤드셋을 끼고 볼륨을 높였다. 현실의 소리를 차단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고요 속의 불안함까지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화를 내며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과로로 쓰러지셨다.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르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내 방문을 부수고 들어왔다는 것을.



​09.

나는 헐떡이며 여자에게 달려가 손에 쥔 것을 건넸다.

여름 이벤트용 칵테일에 꽂혀 있던, 손가락만 한 장식용 우산이었다.


​"이 정도면... 딱 저 달팽이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비를 막아 줄 수 있겠죠."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난감 우산을 달팽이 옆 흙바닥에 깊숙이 꽂았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렸지만, 달팽이는 그 작은 지붕 아래서 숨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음은 이 아이가 결정하겠죠. 감사해요."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 굳어버린 다리를 펴며 일어났다.


나는 왜 이 낯선 달팽이에게, 낯선 여자에게 이토록 열을 올렸을까.



​10.

어머니가 입원하신 며칠간 병실을 지켰다. 아버지는 가끔 들러 말없이 갈아입을 옷만 두고 가셨다.

어머니의 거친 손과 깊게 패인 주름을 마주하고서야 나는 비로소 방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공무원 시험 장수생. 스펙이라곤 없는 서른 중반의 나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유일하게 연락 온 곳이 지금의 편의점이었다.


최저 시급이지만, 내가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마워했고, 아버지도 더 이상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지 않으셨다.


​나에게는 지난 몇 년이 기나긴 장마였다.

그 장마를 대신 맞아주던 어머니의 우산에 익숙해져, 나는 스스로 비를 피하는 법도, 앞으로 나아가는 법도 잊고 살았다.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을 해주셨을 뿐이다. 그 우산 밖으로 나가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여자의 말이 맞다. 과도한 도움은 독이다.

누군가가 항상 우산을 씌워줄 거라 믿고 안주한다면 그 달팽이는 도태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빗속을 뚫고 갈 용기를 얻는다면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다.

​그 이후의 선택은, 달팽이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것이다.



​11.

우리는 나란히 서서 빗속을 걸었다.


​"아까... 왜 달팽이를 보고 계셨던 거예요?"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 저였을 수도 있잖아요."


​때마침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여자의 목소리가 묻혔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 이만 이쪽으로 가봐야 해서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자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그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집에 도착하니 먼저 퇴근한 어머니가 나를 반겼다.

​"오늘은 좀 늦었네? 비 많이 오지? 얼른 씻고 나와, 밥 먹게."


​나는 대충 물기를 닦고 나와 어머니의 저녁상 차리는 것을 도왔다.

어머니가 나를 보며 피식 웃으셨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나의 장마는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북 커버

생성형 AI Gemini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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