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어제

내일은 없다.

by 불완젼


1.

기이한 일이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눈곱의 위치, 턱 밑에 까슬까슬하게 자란 수염까지 모든 게 어제와 소름 돋게 똑같다.

이 기이한 현상이 왜 생겼는지 고민할 틈도 없다. 일단은 출근을 해야 한다. 이것마저 어제와 똑같다.

출근 시간 지하철 승강장. 한 줄로 늘어선 직장인들은 마치 어제 찍어낸 듯 똑같은 무표정으로 서 있다. 나는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정확한 타이밍에 터져 나온 전도사의 외침에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어제와 똑같은 번호의 칸에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창밖을 스쳐 가는 한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어제와 복제된 하루가 분명했다.


사무실은 업무 시작 전인데도 다들 분주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곧 영업지원부 이경미 주임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과장님, 어제 날짜 A 거래처 영업 지표 데이터 나왔나요?'

"과장님, 어제 날짜 A 거래처 영업 지표 데이터 나왔나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나는 항상 그랬듯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네, 경미 씨. 5분 내로 파일 메일로 전달해 드릴게요."

이경미 주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과장. 나는 언제부터 '김OO'이 아니라 '과장'이 되었을까. 어제도 과장, 오늘도 과장이다. 책상 위에 어질러진 서류 더미, 빛바랜 영수증들, 아무렇게나 던져진 볼펜들. 치워봤자 다시 어질러질 게 뻔해 서류 뭉치를 대충 옆으로 밀어두고 노트북을 켰다.


메일함에는 어제와 똑같은 제목의 메일들이 쌓여 있다. 아무 감정 없이 어제처럼 답장을 보낸다. '안녕하세요, OO 과장입니다...'로 시작하는 영혼 없는 문장들.

이제는 내가 나인 것보다, '과장'이라는 직함이 내 진짜 이름인 것만 같다.



2.

12시, 점심시간이다. 매사 귀찮아하는 오철호 대리가 똑같은 메뉴를 제안할 타이밍이다.


'빨리 먹고 들어오게 요 앞 이모네 식당 가죠?'

"빨리 먹고 들어오게 요 앞 이모네 식당 가죠?"


우리 팀원들은 '어떤 점심'을 먹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먹고 쉬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다. 우리는 말없이 좀비처럼 이모네 식당으로 향했다.

똑같은 자리에서 몇십 년 장사를 했다는 식당. 허름하지만 8,000원이면 제육볶음과 반찬들을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음식 나오는 속도는 웬만한 패스트푸드점보다 빠르다.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스크롤 하며 밥만 씹어 넘겼다.


'아, 참 재미없다.'


속으로는 따분해 미칠 지경이지만, 이 반복되는 기이한 현상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제가 반복되고 있어!"라고 외치고 회사를 뛰쳐나가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하니까.

밥을 먹고 흡연 부스로 향했다. 어제도 피웠을 담배다. 내일도 피우겠지. 문득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걱정마저 연기처럼 흩어졌다. 몇 모금 빨다가 담배를 비벼 끄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3.

이미 점심을 마친 직원들이 탕비실에 모여 수다가 한창이다. 오철호 대리는 여직원들 틈에서 신이 나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고 있겠지.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왜 반복되는 걸까? 회사, 집, 회사, 집... 이 무한 굴레를 돌다가 드디어 내가 미쳐버린 건 아닐까?

이 현상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쇼츠 영상 몇 개 보다가 잠드는 게 전부인 삶. 상상력이라는 세포는 이미 말라 비틀어진 지 오래였다.



4.

20대, 갓 전역했을 때의 나는 꽤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동네 형이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땀 흘리며 연탄불을 갈았고, 학교에서는 과팅도 나가고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비록 결혼까지는 못 갔지만, 적당히 즐길 줄 알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사는, 꽤 재미있는 인생이었다.

취업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 잠깐 좌절하고 암울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취업에 성공해 다달이 월급을 받으며 취미도 즐기고 맛있는 것도 사 먹는 멋진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지금의 나는 이렇게 재미없고, 결혼도 못한, 배 나온 아저씨가 되어버렸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 첫 직장에서 만난 '여자친구 A' 때문인지도 모른다.



5.

첫 직장, 나는 어리버리한 신입사원이었다. 매일 야근하며 버티는 내 모습을 좋게 봐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A'였다. A는 나보다 7살 연상인 직장 선배였다. 퇴근 후 몇 번 밥을 먹고, 복도에서 눈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생겼다.

결국 내가 먼저 고백했다. 나이 차 때문에 망설였지만 그녀는 내 마음을 받아주었고, 우리는 사내 연애를 시작했다. 어느 날,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랑 혹시 결혼 생각 있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퍽퍽한 고구마를 껍질째 삼킨 것처럼 목이 턱 막혀왔다.


"어... 어... 있긴 한데, 당장은 아닐 거야... 내가 아직 사회 초년생이잖아."


나의 찌질한 대답을 들은 A는 결국 이별을 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적인 남자를 찾아 결혼했다. 청첩장은 받지 못했지만, 나를 위로해 주던 동료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그때 나는 왜 결혼을 망설였을까. 그녀의 나이가 적지 않다는 걸, 결혼을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A와 헤어진 뒤로는 '안정'이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일, 일, 일. 친구들은 내가 이별 후유증으로 돌아버린 거냐고 걱정했지만, 나는 내가 '안정적인 사람'이 되면 그깟 사랑쯤은 다 해결될 줄 알았다.

그렇게 일만 고집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모니터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건 '과장'이라는 껍데기뿐인 나였다.



6.

A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아니다. 이 기이한 반복 현상이 생긴 건 그녀와 헤어지고 한참 뒤인 지금이다. 그냥 이 상황을 합리화하고 싶어 핑곗거리를 찾은 것뿐이다. 고작 연애 경험 2번이라니,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나온다.

이런저런 옛날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오철호 대리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몰래 사내 연애 중인 홍보팀 신입 '김나리' 씨와 데이트하러 가는 거겠지. 다 티 나는데 본인들만 비밀인 줄 안다.

나는 스마트폰 친구 목록을 의미 없이 드르륵 내리며 터덜터덜 회사를 나섰다. 연락할 사람도, 연락 올 사람도 없었다. 꺼진 스마트폰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축 처진 어깨, 관리 안 된 머리, 퀭한 눈. 영락없는 찌든 직장인의 초상이었다.

퇴근 시간 지하철은 지옥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어제처럼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주황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7.

"크흠."


옆에서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내 옆자리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분명하다. 어제와 다르다! 어제는 이 노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노인이라면 이 기이한 루프의 실마리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저기, 어르신. 어르신도 계속 반복되는... 이 시간에 갇혀 계신 거죠?"

노인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묘하게 깊었다.


"그렇지. 나도 옛날엔 자네처럼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드디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나요? 제발 알려주세요."


노인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인생에 하루쯤은, 좀 다르게 살아도 되지 않나?"


노인은 그 말만 남기고 뒷짐을 진 채 멀어져 갔다. 나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르게 살아라'라니. 너무나 뻔한 해답에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어차피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텐데, 다르게 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체념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캔맥주를 따고 마른안주를 씹으며 노인의 말을 곱씹었다.

'인생에 하루쯤은 다르게 살아도 되지...'


맥주를 들이키려 고개를 젖혔을 때, 냉장고에 붙은 에펠탑 모양의 자석이 눈에 들어왔다. 입사 초부터 돈을 모으고 모아서 기어코 다녀왔던 파리 여행 기념품.


"인생에 하루는 다르게 살아도 되지?"


나는 홀린 듯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까짓것. 내일 아침 무작정 떠나보자. 파리가 아니어도 좋다. 어디든 상관없다. 내일은 어제가 반복되는 날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날로 만들 것이다.

나는 짐을 대충 싸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8.

역시나,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알람이 울렸다. 거울 속의 눈곱, 까칠한 수염까지 소름 돋게 똑같다.

하지만 딱 하나 다른 게 있다. 현관 앞에 놓인 가방이다. 나는 짐을 차에 싣고 무작정 엑셀을 밟았다.

어디든 좋다. 이 답답한 굴레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한참을 무작정 달리다 보니 눈앞에 시원한 동해 바다가 펼쳐졌다. 탁 트인 바다 앞에 차를 세웠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와 메일 알림이 수십 개 쌓여 있었다. 오철호 대리의 전화도 와 있었다.

나는 과감하게 전원을 꺼버렸다. 차 문을 열고 나가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짜릿했다. 반복되지 않는 시간, 이것이 바로 자유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다를 느꼈다...



9.

삐비비빅, 삐비비빅 -

오전 07:30. 지긋지긋한 알람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천장이 보였다. 낯익은 우리 집 천장이었다. 간밤에 참으로 기묘하고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반복되는 하루에 갇혔다가, 노인을 만나고, 바다로 떠나는...

꿈이 현실만큼이나 생생해서 머리를 좌우로 몇 번 세게 털어야 했다. 그제야 멍한 감각이 돌아왔다.


"아... 꿈이었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걷어찼다. 오늘 하루도 출근을 하면, 어제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꿈속의 바다 냄새가 코끝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 커버 이미지 : 생성형 AI Gemini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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